이후락(李厚洛·85) 전 중앙정보부장이 10월31일 별세했다. 지난 5월부터 노환과 지병으로 서울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최근 급격히 병세가 나빠지면서 이날 오전 11시45분 숨졌다.

이 전 부장은 '제갈조조'라고 불릴 정도로 전략과 술책에 뛰어난 박정희 정권의 책사였다. 한때 유신정권의 2인자로 불렸지만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됐고,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뒤 별세할 때까지 30년간 칩거해왔다.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 전 부장은 46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한 뒤 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軍) 생활을 했다. 군에서 미 CIA와의 연락업무에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 대통령과도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인연이 맺어졌다고 한다.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공보실장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선 고인은 63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고, 박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맞붙었던 71년 대선 땐 중앙정보부장이었다. 72년 5월엔 밀사(密使)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인들은 그를 '재치있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김영광 전 의원은 "한 번은 박 대통령이 골프 하다가 이 당시 중정부장에게 '임자는 왜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은 어떤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서 더듬는 겁니다'라고 했고, 박 대통령이 '임자를 보니 그런 것도 같네'라며 크게 웃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이날 고인의 빈소에서 만난 중앙정보부 출신 한 지인(72)은 "정말 샤프(sharp)하고 컴퓨터 같은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정확히 읽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70년 주일대사 근무 시절 초밥을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을 위해 도쿄 한국대사관 앞 횟집에서 그날 아침에 만든 초밥을 항공편으로 보내고, 대북 밀사로 가면서 "일이 잘못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독약을 갖고 가는 등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했다.

비서실장 시절 朴대통령과 파안대소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박정희 대통령(왼쪽 두 번째), 김성은 국방장관(왼쪽 세 번째) 등과 함께 참석한 한 모임에서 웃고 있다.

하지만 그는 1973년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중정부장으로서 10월 유신과 남북비밀접촉 등을 '성공'시키자 정치권에서 "이후락이 후계자"란 말이 돌았다. 그해 4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이 말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전격 구속되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지자 그는 권력의 눈 밖에 났다. 그 직후인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중정(中情)이 주도한 것도 '정치적 생존'을 위한 이 전 부장의 무리수였다는 분석과 증언이 있다.

그는 결국 73년 12월 중정부장직에서 물러난 뒤 한때 영국령 바하마로 사실상 망명하기도 했고, 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됐다. 당시 그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정치자금을 만지다 보니…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만들 수 있느냐"라고 한 발언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그는 30년 야인 생활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끊었다. 서울 용산구 자택에 유치원을 만든 뒤 경기도 광주의 대지 1500평 규모 본인 소유 도요(陶窯)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2000년 전후부터 살았던 경기도 하남 자택은 빚 때문에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SK, 한화 등 대기업들과 사돈도 맺었다. 둘째 며느리가 한화 김승연 회장의 누나이고, 막내며느리는 SK 창업주의 딸로 SK 최태원 회장과 사촌 사이다. 하지만 장남이 일찍 숨지는 등 크고 작은 우환이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한 지인은 "도자기 구우면서 지낼 때만 해도 이 전 부장이 자유인, 자연인처럼 마음 편히 지냈는데, 1~2년 전부터 주변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며 "똑똑했던 사람이 그렇게 됐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당시 치매기가 보인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빈소에서 만난 또 다른 지인은 "이미 1~2개월 전부터 위독하다는 말이 돌아서 친했던 사람들이 '숨지기 전에 봐야 한다'며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을 못 알아보는 상태였다"고 했다.

30년 칩거 생활 후에 죽음을 맞은 그의 빈소에는 화해와 용서의 분위기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조화를 보냈다. 빈소를 찾은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는 "고인은 비록 유신독재와 김대중 납치 사건 등에 가담했지만 돌아가신 만큼 용서와 화해 차원으로 조문을 왔다"며 "7·4 남북 공동성명도 남북 화해의 틀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빈소 안과 바로 옆 복도는 각계에서 보낸 수십개의 조화들로 빽빽했다. 이명박 대통령, 김형오 국회의장, 정운찬 총리,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한나라당 대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등의 조화도 보였다. 사돈인 최태원 SK 회장·김승연 한화 회장, 김원기 전 국회의장,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 이재정 전 통일장관 등은 직접 조문했다. 과거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에서 고인과 함께 일한 지인들도 빈소를 찾았다.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양희재 전 비서관은 "고인은 지난 30년간 조용히 지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뒤안길로 물러선 분인데 역사적인 평가를 언젠가 해드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유족으로는 동훈(전 제일화재보험 회장)·동익·동욱·명신 등 3남1녀가 있으며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이다. (02)440-8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