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영토였는데 왜 중국으로 바뀌었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러시아 영토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왜 일본 법에 의해서 안중근 의사가 처벌받았는가.
― 수원 장안구 독자 김기영씨
A: 을사늑약 근거해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였으나 불법적 재판
안중근 의거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영토는 아니었습니다. 청(淸)나라 땅이지만 러시아에 조차(租借·조약을 근거로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빌리는 것)된 지역입니다. 하얼빈은 1896년 청·러 비밀협약에 따라 러시아가 동청(東淸)철도 부설권을 얻으면서 러시아가 건설한 신도시입니다. 동청철도는 러시아 타르스카야로부터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우수리스크를 연결하는 1481㎞ 구간을 말합니다. 하얼빈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각국에 개방되어 영국·프랑스·일본 등 20여 개국의 영사관이 들어선 국제도시가 되었습니다. 1933년 7월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이 하얼빈특별시를 만들었고, 일제 패망 후에는 자연스럽게 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중국 하얼빈시 홈페이지 www.harbin.gov.cn )
러시아 관할 동청철도 구역인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사법권 아래 있었습니다. 러시아 당국이 안중근을 먼저 수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심 수사는 동청철도 철도경찰국장 직무대리 니키포로프 헌병 대위, 하얼빈 경시총감 직무대리 체르노그라조프 헌병 대위 등 러시아 당국자들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사건 발생 14시간 만에 안 의사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인도합니다. 일본의 집요한 공작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염려한 러시아 당국의 고려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 의사의 재판 관할권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습니다. 당시 미조부치(溝淵) 검찰관은 "하얼빈은 청국 영토지만 동청철도 부속지인 동시에 공개지로 청국에 대해 치외법권을 가지는 각국은 이 지역에서 자국 신민에 대해 법권을 가진다"며 "명치 38년(1905년) 11월 17일 일한보호조약(을사늑약) 제1조에 따라 한국 밖에서의 한국신민 보호는 제국 관헌이 집행하게 되어 있다"고 관할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관선 변호사조차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가마다(鎌田) 변호사는 "(한국민에 대한 재판은) 소위 외교 위임을 초월한 입법권의 위임"이라며 "적용해야 할 법은 한국 형법"이라고 변론했지만, 일제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습니다.
일본 학계도 재판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중근·하얼빈 학회가 이번주 초 개최한 '안중근 의거 10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도쓰카 에쓰로(戶塚悅郞) 류코쿠대 교수(법학)는 "안중근 의군참모중장 재판에서 재판소가 검찰관할권의 근거로 삼은 1905년 한국보호조약은 유효하게 체결되지 않았다"며 "그 결과 (일제) 재판소에는 관할권을 내세울 법적 근거가 없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