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맞아 별장을 찾은 ‘앤(나오미 와츠)’과 남편 ‘조지(팀 로스)’, 그리고 그들의 아들 ‘리틀 조지’.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 햇살보다 더 눈부신 흰 옷을 입은 청년이 찾아왔다. 달걀 4개를 빌리러 왔다는 이 청년, ‘피터(브래디 코베)’는 무척 예의가 바르다. 그런데 피터는 실수로 달걀을 여덟 개나 깨뜨리고 우연히 앤의 핸드폰을 물 속에 빠뜨린다. 은근히 신경을 긁는 이 청년의 방문에 휴가 첫날 한껏 들뜬 앤의 기분은 엉망진창이 된다.
집을 나가달라는 앤의 정중한 부탁에 피터와 그의 친구 ‘폴(마이클 피트)’은 달걀 네 개를 아직 받지 못했다며 버틴다. 화가 난 남편은 폴의 뺨을 치고, 이에 피터는 조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된다. ‘12시간 후 앤의 가족이 죽을까요, 아니면 이 생뚱 맞은 두 방문자가 죽을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이것은 ‘퍼니 게임’이다. 하지만 영화 ‘퍼니 게임(Funny Games U.S.)’을 보며 ‘재미있음’, ‘우스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폴과 피터, 그리고 감독 ‘미카엘 하네케’뿐일 것이다. ‘funny’의 또 다른 의미인 ‘이상함’, ‘괴상함’, ‘뻔뻔스러움’을 느끼는 쪽은 앤의 가족과 대부분의 관객들이다. 그러니까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 ‘퍼니 게임’은 전혀 유쾌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언짢다.
그런데 관객은 이 영화에 그렇게 불쾌함을 느끼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영화 ‘퍼니 게임’은 정말 그 자체로 그저 ‘장난’일 뿐이기 때문이다. 앤이 피터를 총으로 시원하게 쏴버리는 영화 속 가장 통쾌한 장면에서 폴은 TV 리모콘을 들더니 ‘되감기’ 버튼을 눌러 이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편집의 묘를 살려 감행한 이 해괴한 반칙으로 영화 ‘퍼니 게임’은 한낮 감독의 영화적 장난임을 관객 모두에게 알리니, 이제부터의 승부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런데 이미 결과가 뻔한 게임을 지켜보며, 관객은 끝까지 저 불쾌한 방문자들의 처절한 응징을 목 놓아 기다린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트 안의 칼이 허무하게 폴에게 발견될 때까지도 그 기대감은 도대체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말의 아량 없이 예정된 승부로 마무리 된 게임의 결과에 결국 관객들은 참담함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선다.
이토록 속절없는 패배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카엘 하케네의 도무지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연출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메뚜기의 다리를 하나하나 뽑아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의 폴과 피터가 시종일관 깐죽대는 동안 앤과 조지, 그리고 그의 아들은 생애 최대의 공포, 그 극한을 체험한다.
감독은 이 영화는 그저 장난일 뿐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 해놓고 앤의 가족들이 겪는 공포를 극악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또 실시간으로 묘사한다. 거의 고문 수준이다.
폴은 시간까지 되돌릴 만큼 전지전능한 영화의 지배자인 반면, 앤의 가족들은 그저 이 끔찍한 현실에 던져진 가엾은 희생자일 뿐이다. 폴과 앤 가족의 관계는 감독과 관객의 관계와 상통한다. 감독은 폴과 피터가 그런 것처럼 관객에게 계속 깐죽댄다. 그저 영화일 뿐인데 뭐 그리 심각하냐고. 하지만 물에 젖은 핸드폰을 헤어 드라이기로 말리는 앤과 조지를 보며 관객들은 어차피 죽어 없어질 한갓 미물일 뿐인 인간 존재를 회의하고, 가차없는 현실의 냉혹함에 허무해 한다.
영화를 지배하고 현실을 유린하는 완벽한 장난, ‘퍼니 게임’을 미카엘 하네케 스스로가 10년 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 한 걸 보면 이 장난이 감독에게는 꽤나 ‘funny’했던 모양이다.
10월 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