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일본의 큰 충노(忠奴)가 세 사람이 있는 것은 부득불 방성대곡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제일 충노 송병준은 일본에 아첨하야 자위단 토벌대로 전국을 소요케 하며, 제이 충노 조중응은 동아개진교육회의 두령이 되어 80만 보부상을 회집하여 이토의 호령을 기다리며, 제삼 충노 신기선은 이토의 돈 일만환으로 대동학회를 확장하야 유림을 위협하고 일본 권력에 복종케 하니….'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대한매일신보'(1908.4.8)에 '일본의 큰 충노 세 사람'이란 논설을 실어 '대동(大東)학회'의 신기선(申箕善)을 '일본의 충실한 종'으로 질타했다.

대동학회는 1907년 3월 이완용이 신기선 등 전직 관리들을 내세워 신·구 사상의 통합을 명분으로 조직한 친일 유교단체이다. 이 학회는 '대동학회월보' 간행, 강연회 개최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통감부와 친일 내각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출세 지향적인 유림들이 많이 참여했다. 유학을 체(體)로 삼고, 신학문을 용(用)으로 삼는다고 하여 신·구 학문의 체용론적 발전을 주장했으나 문명의 모델을 일본으로 제시함으로써 통감부체제를 뒷받침했다.

이에 미국 교민들이 발행한 '공립신보'도 '개 돼지보다 못한 대동학회'(1908. 4. 29)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비난받는 대동학회의 유지비는 국고에서 지원되었으며, 황제(순종)와 황태자는 1만3000원의 하사금을 내리기도 했다. 대동학회는 '둘째 일진회'라며 손가락질 받는 등 한국인의 거부감이 커져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1909년 이름을 '공자교회'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10월 8일 논설('마귀학회 이름 변개')을 통해 다시 질타했다.

애국적이고 혁신적인 유학자였던 박은식(사진 왼쪽), 박은식이 발표한 서북학회월보(1909.3.1)(사진 오른쪽).

'머리 위에 공자를 이며 등 뒤에 성경을 지고 입으로 대학지도를 외우면서 꿩 사냥 포수가 꿩의 소리를 하여 꿩을 속여 부르는 것같이 유교하는 무리의 면목을 꾸며가지고 유교를 멸망시키려는 대동학회가 그 이름을 변하여 공자교회라 하였도다.'

일제의 유교계 친일화 공작에 대해 박은식, 장지연 등 애국적이고 혁신적인 유학자들은 1909년 9월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해 대항했다. 대동교는 순자와 주자 등에 의해 단절되었던 공자의 대동사상을 맹자의 민본주의와 왕양명의 지행합일설 실천을 통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은 앞서 서북학회월보(1909.3.1)에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유교가 '제왕'이 아니라 '인민사회'의 편에 서야 된다는 것을 역설했다.

'소위 3대 문제 중 일(一)은 유교파의 정신이 전히 제왕(帝王)측에 있는 고로 인민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함이오. 유교의 힘이 인민사회에 보급되어 민지를 개발하고 민권을 신장케하였으면….'

망국의 위기 속에서 민족주의적 유림들도 '유학의 개혁'을 고민했다. 그들은 대한제국 정부가 후원하는 대동학회에 대항하여 '제왕의 유교'를 '인민사회의 유교'로 혁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유교사상 속에서도 '국민의 나라'가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