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민(38·서울 마포구)씨는 최근 주말 저녁 케이블 TV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MBC의 오락 프로그램인 '세바퀴(세상을 바꾸는 퀴즈)'가 저녁 무렵에는 MBC계열 케이블채널인 'MBC에브리원'에서 방송되더니 이어서 같은 MBC 계열 채널 'MBC드라마넷'에서 재방송이 나오고 다시 MBC 본 방송에서 '세바퀴'가 방송되더라는 것. 이날 저녁 무렵부터 3시간 넘게 '세바퀴' 본방·재방송이 채널을 바꿔가며 나온 것이다.

이처럼 주말 황금 시간에 MBC는 채널 11번과 계열 케이블·위성 채널 등에서 인기 프로그램 재방송을 집중 편성, 시청자들을 잡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상파 KBS·SBS도 경쟁적으로 자사 계열의 케이블 채널 숫자를 늘려가고 있어, '지상파의 케이블 채널 독점'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시청자들은 "케이블 채널이 외견상 숫자는 많지만 실제로는 지상파 재방송 프로그램들로 채워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지상파 재방송 채널로 전락한 케이블TV

지상파의 케이블 계열 채널들은 지상파의 '재방송 채널'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들 방송사의 편성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달 26일 MBC드라마넷과 MBC에브리원, MBC 3개 채널의 편성표에서 '세바퀴'를 찾아보면, '세바퀴'는 먼저 오후 5시5분부터 7시15분까지 MBC에브리원 채널에서 재방송 2회분이 방송된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이어서 7시20분부터는 MBC드라마넷이 바통을 이어받아 재방송을 2회 방송했다. 그리고 밤 10시40분부터는 MBC 본방에서 정규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식이었다.

이는 다른 방송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상파들은 소위 '뜨는' 프로그램이다 하면,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돌림 편성'을 하고 있다. 시청률조사기관 TNS가 지난 7월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KBS드라마와 KBS JOY 2개 채널에서만 '강호동의 1박2일'을 한 달간 223회 방송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한도전'의 경우도 MBC드라마넷과 에브리원, MBC ESPN 3개 채널에서 177회나 방송했다. SBS 계열 채널의 경우 주말이면 '패밀리가 떴다'를 집중 편성하고 있었다. 케이블채널인 온미디어 관계자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케이블까지 진출해 자사 계열 채널에서 계속 같은 프로그램만 틀어대다 보니 애초에 케이블·위성TV를 도입한 취지라고 할 수 있는 방송 콘텐츠의 다양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지상파 계열 방송채널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사 계열 PP를 확대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MBC는 이달 5일 생활문화채널을 표방하는 'MBC라이프'를 개국한다. MBC는 지난 3월 자회사 MBC플러스미디어를 통해 중소 규모인 앨리스TV를 인수했고, 여기에 'MBC' 문패를 달아 재개국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 함께 인수한 '채널텐'도 조만간 MBC의 방송 채널 확장 전략에 따라 재개국할 전망이다.

SBS도 올 초 위성방송에서만 나오던 'UTV'를 'E! 엔터테인먼트TV'로 재개국했으며, 최근에는 CJ그룹으로부터 스포츠채널 '엑스포츠'를 인수해, 계열 채널로 재론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KBS도 다른 지상파의 추이를 지켜보며, 내년쯤 추가 채널 론칭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지상파들이 앞다퉈 채널 확장에 나서는 이유는 한마디로 '돈벌이'를 위해서다. 지난해 KBS·MBC·SBS 계열 채널들은 각각 45억·50억·168억원 흑자를 냈다. 재방송만 틀어서 별도의 제작비가 들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일반 케이블TV 채널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고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CJ미디어(계열 채널 포함)는 지난해 3618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1110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만 1226억원을 쏟아붓고 나온 결과다. 반면 SBS계열 채널들을 보면, 방송프로그램 제작비로 106억원을 쓰고서도 매출 1433억원에 순이익 168억원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케이블TV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상파가 재방송으로 케이블채널 시장을 장악하는 바람에 비(非) 지상파 계열의 채널들이 설 땅을 잃었다"면서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붓는데도 지상파의 시장 독점을 뛰어넘기 힘들다"고 말했다.

KBS '1박 2일'(시진 위), SBS '패밀리가 떴다'

유명무실한 규제 조항

방송법 시행령은 지상파 방송사가 국내 전체 방송채널 수의 3%를 초과해 채널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한 규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는 국내에 등록된 방송채널 수 239개(6월 말 기준)의 3%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 7개까지 계열 채널을 보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실제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최성진 산업대 교수는 "방송채널로 등록만 해놓고 실제로는 방송을 내보내지 않는 채널(휴면채널)도 많다"며 "서류상의 채널을 기준으로 '3%룰'을 적용하면 허점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실제로 방송을 하고 있는 채널의 숫자는 160여개. 여기에 3%룰을 적용해 지상파에는 4개 정도의 채널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케이블·위성 방송채널에서 지상파방송 프로그램의 재방송 횟수나 비율에 대한 규제는 없다. 박천일 숙명여대 교수는 "지상파의 과도한 방송 채널 과점을 막으려는 법 제정의 취지가 현실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상파 계열 PP의 재방송 비율을 제한하고 자체 제작 비율을 늘리도록 의무화하는 강제적 수단까지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