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수(39)는 최근까지 폭풍을 맞은 배 위에서 홀로 하이힐을 신고 고군분투하는 선장처럼 보였다.

지난 9월 종영한 드라마 '스타일'은 유행을 창출하는 덴 성공했지만 시청률에선 다소 고전했던 작품이었다. 시청자들은 비현실적인 극 전개와 연기를 두고 불만을 터트렸지만, 정작 주인공 김혜수만은 30~40대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icon)으로 새삼스레 자리매김했다. 혹평과 환호가 교차했던 이 드라마가 끝난 지금, 김혜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일 서울 삼청동. 햇살이 기울어진 한옥 마당으로 그녀가 하이힐을 신은 발을 들이밀었다.

―드라마를 끝낸 기분이 어떤가?

"촬영 끝나고 함께 일한 사람들이랑 2주 정도 여행했다. 통영·제천·양양을 돌면서 발야구도 하고 비 오는 날 영화도 보러 가고. 말도, 탈도 많았지만, 나한텐 참 여러모로 잊지 못할 작품이다. 방송 끝나고 모처럼 미니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니 쪽지가 무척 많이 왔더라. '박기자가 내게 큰 용기를 줬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단순히 '멋있어요' '예뻐요'가 아닌. 놀랐고 또 뿌듯했다."

―처음엔 드라마 출연제의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무작정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요즘 조카들에게 푹 빠져 있는데 이 녀석들을 하루종일 못 본다고 생각하면 아침부터 서글프다. 게다가 원래 급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은 잘 안 맡는 성격이다. 몇 차례 이야기가 오간 끝에야 '오종록 감독의 역량을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엣지 있게"를 외치는 박기자의 모습이 강렬하긴 했지만 드라마를 과장되게 만들었다는 평도 많았다. 패션도 그렇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민이 많았다. 한편으론 나약하고 때론 구질구질하고 어떨 땐 비열하기도 한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이거 너무 폼만 잡는 거 아닌가' 싶었던 때도 많았다. 내가 직접 의상을 연구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차림으로 접근했을 것 같다.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왠지 달라 보이는 그야말로 내공 있는 옷차림 같은 것. 스타일리스트가 최선을 다해줬고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서울 삼청동에서 살고 있는 배우 김혜수. 그는“점점 자연이 그리워지고 한옥이 더 좋아진다”며 인터뷰도 삼청 동에서 하자고 제안해 왔다.

―드라마가 유행시킨 '엣지(세련된)'란 말은 어땠나. 거부반응은 없었나?

"별로.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엣지'다. 그룹 'U2'의 기타리스트 '디 엣지(The Edge)'를 워낙 좋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처음 대사를 봤을 때도 '하하 이 대사 재미있네' 했다. 원래 '간지 있다'는 말을 무척 싫어한다. 정체불명의 일본말 아닌가. 그보단 '엣지'가 낫지 않나?"

―유일하게 혼자 진지하게 연기하는 인물처럼 보였던 게 사실인데.

"그게 과연 칭찬인 건지 모르겠다. 감독, 작가, 배우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 같다. 드라마가 원래 그리려고 했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슬쩍 바뀌고, 박기자 중심으로 끝나버린 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어떤 게 있나.

"'최화영'이란 배우의 복귀를 화보로 진행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 박기자의 모습은 성숙한 여성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최화영'이란 캐릭터가 무척 거만하고 도도하게 묘사되는데, 같은 여배우로서 불쾌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나도 혹시 저런 모습은 아닐까' 반성하기도 했고."

―이 드라마로 김혜수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의견이 많다. '작품 안목은 없는 배우'란 평을 듣기도 했는데, 언제부터 달라졌나.

"어릴 땐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방송국은 날 주말드라마, 미니드라마, 월화드라마로 돌려가며 내보내려 했고. 저항할 힘도 없었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런 현실이 싫어 가출했던 적도 있다. 아파트 근처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다시 돌아왔지만(웃음). 돌아보면 참 한심하고 가여웠던 시절이다. 대학 시절 첫사랑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혼자 밥 먹을 용기가 없어서 카페에서 배를 움켜쥐고 무작정 오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뒤늦게 도착한 그 남자가 그랬다. '혼자서 밥도 못 먹는 애가 대체 뭘 한다는 거니?' 그때부터 '아, 나도 이젠 주체적으로 살아야겠구나', 깨달았던 것 같다."

―김혜수도 외모에 집착할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나?

"거울 볼 때마다 불만이지. 체격도 큰 편이고 배우로서 부족한 점이 많은 얼굴이다. 가끔 내 사진을 보고 네티즌들이 '장군'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괜찮다. 다이어트는 닥치면 한다. 드라마 찍기 전 무작정 굶어서 1~2㎏ 빼는 식이다. 운동하고 평소에 계획해서 몸매관리 하는 건 체질이 아니다. 지금 내 모습은 이렇게 때 빼고 광낸 상태이지만, 사실 그건 다 남들이 도와준 덕에 유지되는 모습 아닌가."

―내년이면 마흔이다.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나?

"원래 계획하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다. 서른이 됐을 때도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눈가 잔주름은 조금 더 늘겠지만, 천천히 살려고 한다. 아이들과 놀면서 산책도 하고, 심호흡도 하고. 충만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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