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전 7시30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원터길. 200여m 왕복 2차선 도로 양방향으로 승용차·택시·마을버스 등이 쉴 새 없이 오갔다. 교복 차림의 여고생 수백 명이 길 양옆을 걷고 있었다.
이곳에 포장된 보도의 폭은 60㎝. 그나마도 전봇대나 불법 주차 오토바이가 있으면, 이를 피해 차로를 밟아야 했다.
성일여고 한 교사는 "원터길과 하대원동이 연결된 90년대 중반부터 차량 통행이 급증했다"며 "매일 아침 2000명 이상이 이 길을 따라 등교한다"고 말했다. 성남여고 한 학생(16)은 "아침마다 사고를 당할까 겁난다"며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할 뻔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고생 목숨 앗아간 등굣길 사고
성남여고 1학년 박슬기(16)양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는 지난 17일 오전 성남여고 정문에서 40여m 되는 경사 30도 정도의 비탈길 끝 삼거리에서 발생했다. 이 삼거리는 원터길에서 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성남 중원경찰서에 따르면, 평소처럼 하대원동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온 슬기양은 이날 오전 7시50분쯤 성남여고와 성일여고 정문 앞 삼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성남여고 급식시설 공사현장에서 나온 토사를 실은 대형 덤프트럭(15t)이 정문을 나와 내리막길로 내려왔다. 운전기사 이모(58)씨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내리막길 아래쪽에 있던 학생들을 피하기 위해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렸다. 트럭은 슬기양와 같은 반 최모(16)양을 덮쳤다.
최양은 중상을 입고 인근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슬기는 오른쪽 뒷바퀴 밑에서 숨을 거뒀다.
◆등굣길 드나든 15t 덤프트럭
경기도교육청의 특별감사에서 학교 측은 몇 차례 등·하교 시간 공사차량 운행 자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반면 현장소장은 "소음공사 자제와 안전대책 등 포괄적인 내용으로 협조 요청을 한 차례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도교육청 관계자는 전했다. 그러나 고1·2학년이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른 사고 당일엔 공사 관계자가 학교 측에 차량운행 시간에 대해 통보하거나, 학교 측이 시험 실시에 대해 알려주는 등의 업무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운전기사 이씨는 "당시 공사장 진입로에는 안전 요원이 없었다"고 말했다.
◆대책 놓고 큰 입장차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사고는 원터길 도로확장과 통학로 개선을 둘러싸고 성남시와 학교, 인근 주민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수수방관한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성남시에 따르면, 시(市)는 2006년 원터길 도로확장을 위한 설계를 완료했었다. 하지만 공원로 확장 시기와 겹쳐 사업을 뒤로 미뤘다. 또 이주 대책 확보가 불가능해 사업 진행이 어렵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도로과 관계자는 "300여 가구가 이주해야 하는데, 주민들이 위례신도시 내 특별분양을 요구하고 있어 사업 진행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공원로 확장사업을 벌이면서 보상 문제로 주민들과 충돌한 경험 때문에 시가 원터길 문제에 손댈 엄두를 못내 왔다"고 주장한다. 학교 측도 "통학로 개선을 요구해 왔다"고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사고 후, 대책 마련에도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시는 성남중앙초교 담장 옆에 폭 2m의 인도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학교장들은 원터길을 일방통행로로 바꾸고, 좌우에 인도를 만들자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상가 주민들은 "근본적인 대책은 도로확장 뿐"이라는 입장이다. 등교시간 '차 없는 거리' 조성엔 학교 측이 반대한다. 승용차로 출근하는 교사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 현장 옆 담장에는 슬기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노란색 쪽지가 붙어 있다. '슬기야 미안하다, 미련한 어른들 때문에…. 사랑하는 엄마 곁에서 편히 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