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고 6명, 춘천고 6명, 원주고 4명(2009학년도 서울대 합격생)'.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이모(44)씨는 올해 초 대학 입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도(道)내 세 고교의 진학 정보부터 입수했다. 중3 아들을 내년 어느 학교로 보낼지 결정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세 학교에 대한 평판이 워낙 비등비등해 고민된다"며 "다른 학부모들과도 만나 정보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비평준화 지역인 강원도에선 3대 명문고로 꼽히는 강릉고·춘천고·원주고가 좋은 학생을 유치하려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20일 공개된 수능시험 1·2등급 학생 비율의 시·군·구 순위에서 '강원도의 힘'이 단연 눈에 띄었다. 각 영역에서 강릉·원주·춘천 세 도시가 전국 232개 시·군·구 중 상위권에 나란히 오른 것이다. 강원도는 전국에서도 사교육을 가장 덜 받는 지역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선전한 것은 강릉고·춘천고·원주고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 간 경쟁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충남 공주, 광주광역시, 경남 거창 등 우수한 성적을 낸 비(非)수도권 다른 지역의 비결 역시 비슷했다. '다른 학교보다 더 잘 가르쳐야 한다'는 학교 간 경쟁이 낳은 선(善)순환의 결과였다.
◆3대 명문고의 1등 경쟁
강릉고·춘천고·원주고는 매년 신입생 모집 때마다 커트라인 경쟁을 벌인다. 강원도 교육청 관계자는 "세 학교의 경쟁심이 워낙 심하니 대학진학 실적은 기사에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세 학교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특색이 있다. 춘천고는 타학교보다 강도 높은 수준별 수업으로 유명하다. 국·영·수뿐 아니라, 과학·사회탐구 영역까지 수준별 분반 수업을 실시한다.
강릉고는 학생 간·선후배 간 교류와 협력을 중요시한다.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이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상위권 학생이 하위권 학생을 가르친다.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이 자신의 직업이 장래희망인 후배의 멘토가 되는 프로그램도 있다.
원주고는 "언어영역·논술만큼은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번 언어영역 수능 1·2등급 비율에서도 원주가 춘천을 크게 앞섰다. 원주고 오승환 교감은 "학교가 같은 종류의 권장도서를 90~100권씩 구입해 전교생이 돌려보도록 하는 등 독서·논술 교육을 중시한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밝혔다.
3대 명문고의 경쟁은 다른 학교들에도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강릉고가 상위권 학생이 하위권 학생을 가르치는 '스터디 그룹' 제도를 운영하자, 명륜고·강릉여고·강일여고 등 강릉지역 학교들이 '멘토-멘티 제도' 등 유사한 제도를 앞다투어 도입했다. 강원도교육청은 이 같은 벤치마킹 경쟁을 장려하기 위해 지역별로 교감모임·진학부장모임 등을 앞장서서 주선하고 있다.
◆"라이벌은 나의 힘"
충남 공주시는 언어영역에서 전국 1위, 외국어·수리영역에서 서울 강남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충남교육청 중등교육정책과 최재룡 장학사는 "본래 '교육도시'로 알려질 만큼 교육열이 높은 것도 한 이유지만, 쌍벽(雙璧)을 이루는 두 학교가 경쟁을 벌여 시너지 효과를 낸 덕분이 크다"고 밝혔다.
공주시의 '라이벌'은 개교 54주년을 맞은 공주사대부고와 후발주자인 한일고다. 한일고는 2002년 농어촌 자율고로 지정돼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면서 전통 명문인 공주사대부고를 추격해왔다.
두 학교 모두 '공주 대표 학교'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공주사대부고는 본관 측면에 수년째 '대한민국 공교육의 자존심'이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고, 한일고는 학교 광고에 '대한민국 최고 수준 학교'란 문구를 내세운다. 최재룡 장학사는 "우수한 수준의 두 학교가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면서, 다음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들까지 성적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고 밝혔다.
두 학교는 '라이벌'의 존재가 학교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공주사대부고 강병갑 교감은 "한일고가 과거보다 두각을 많이 나타내면서 열심히 하고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한일고 조재승 교감은 "학교 개교(1987년) 초반부터 공주사대부고를 보고 열심히 노력했고, 그 간격을 많이 줄였다"고 말했다.
◆'학교선택제'의 효과
광주광역시는 남구·서구·북구 모두 수능 성적에서 전국 상위 20위 내에 들었다. 전국 대결에서 광주 3개 구(區)가 엎치락뒤치락 다툰 형국이다. 광주엔 과학고 한 곳 말곤 특목고도 없다. 광주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 한두 곳을 꼽을 수 없을 만큼 우수한 학교, 특히 사립 명문이 많아 서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치열한 경쟁은 2002년 고교배정에 선(先)지원, 후(後)추첨제를 도입한 이후 강화됐다. 단일 학군인 광주는 학생들에게 1단계로 시 전체에서 원하는 학교 2곳, 2단계로 거주지에서 가까운 학교들 중 5곳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 장학진흥과 김재근 장학관은 "선택제를 도입하니 학교들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고 밝혔다.
광주시 명문 사학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고려고 윤대웅 교장은 "우수한 학교가 많다 보니 서로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게 되고 결국 전체 교육의 질이 업그레이드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