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차다. 까만 하늘엔 거대한 조명 크레인이 둥실 떠있다. 바다와 분수대를 배경으로 파티장이 차려졌다. 우아하게 와인잔을 든 매혹적인 드레스의 여인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어? 근데 연회장 가운데 단상 위에 서 있는 다섯 명의 밴드부가 수상하다. 마우스 피스에 입만 대고 소리는 내지 않는다. 흥겨운 듯 허리와 발만 까딱거리는 '몸싱크'를 하고 있다. 이때 밤하늘을 가르는 한 남자의 포효가 울린다. "커~엇!" 감독의 사인과 함께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분수대 난간에 기대 앉는다. 부들부들 떨면서 가운이나 외투를 어깨에 뒤집어썼다. 이곳은 강원도 양양의 한 리조트. 영화 '걸프렌즈' 촬영이 진행되는 곳이다. '걸프렌즈'는 강혜정 한채영 허이재 배수빈 주연의 로맨틱 '섹시' 코미디다. 난간에 모여 앉은 이들은 모두 엑스트라들. 한 단역 배우는 "엑스트라 50명 정도가 파티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됐다. 어제는 밤에 너무 추워서 핫팩을 달고 있었다"고 말했다. |
세 여자의 난투극… 한채영 "어~ 피난다" |
머리채 잡고 뒹굴고…4번만에 OK 막내 허이재"선배들 어떻게 때려" 임신한 강혜정 분수대에 몸 던져 |
▶배수빈을 놓고 벌이는 세 여자의 혈투
송이(강혜정)와 진(한채영) 보라(허이재)는 모두 진호(배수빈)를 좋아한다.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으로 모인 이들은 일종의 '동맹 관계'를 형성, '우정'을 쌓아간다. 17일 촬영은 한 야외 파티장에서 송이와 진, 보라가 진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면서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저 멀리서 까만 드레스를 입은 한채영이 여신의 자태로 광장을 가로질러 왔다. 한채영은 파티장 바로 옆의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차를 시켰다. 우아하게 앉아있는 한채영을 향해 어김없이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불을 뿜는다.
파티장에선 대역들이 세 여자의 싸움을 재현하기 바쁘다. 머리채를 붙잡고 몸싸움을 벌이다 탁자가 넘어지고 와인잔이 깨진다. 급기야는 분수대에 몸을 던진다는 설정이다. 이 추위에 임신한 강혜정은 괜찮을지 걱정이다.
▶4번만에 OK사인 떨어진 머리채 싸움
"(허)이재야, 넌 아직 젊어서 머리숱 많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자들의 싸움을 구경온 배수빈이 허이재를 달랜다. 허이재는 선배들의 머리채를 붙들고 몸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
세 여자가 유리로 된 주방문 안쪽에서 서로의 머리를 붙잡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주방문을 밀고 나오다 카메라 앞까지 와서 넘어진다.
"쿵" 하고 땅이 크게 울렸다. "어?" 감독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다. 카메라 감독과 무술 감독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허리를 구부린 채 머리를 붙잡다 보니 배우들의 얼굴이 잘 잡히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갑시다."
세번째까지 마치고 배우들이 모니터 앞에 모여 앉았다. 자신들의 망가진 모습에 까르르 웃는다. "너무 금방 넘어지니까 얼굴이 안보여. 한 번 더 놀아주고 쓰러지라고." 배우들은 군소리 없이 일어나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채영의 무릎에 흐르는 피, 범인은?
네 번째 액션신이 끝난 뒤 배우들이 다시 아까의 모니터 앞자리에 모여 앉았다. 한채영의 덤덤한 한 마디. "어, 피."
긴 기럭지의 한채영이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자 오른쪽 무릎에 피멍이 들어있고 살갗도 조금 까져 있었다.
"어떡해. 나 피 나."(채영) "모기 물린 거 아니에요?"(혜정) "이거 지금 니 힐에 찍힌 거잖아."(채영) "언니 다리 보험들어놓은 거 아니었어?"(혜정) "흥, 니가 좀 들어주라. 야 근데 왜 침을 발라."(채영) "아 가만있어봐. 이런 건 침 발라야 돼."(혜정)
강혜정과 한채영의 장난스러운 실강이가 잦아들 즈음 제작부에서 조그마한 구급함을 가져왔다. 강혜정이 직접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이날 촬영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임신 초기인 강혜정은 주위의 우려에 아랑곳 않고 넘어지는 장면, 물에 들어가는 장면을 거뜬히 소화했다.
영화사의 강민경 팀장은 "물에 빠지는 장면은 대역 배우들이 했고, 물에서 나오는 장면을 배우들이 직접 했기 때문에 강혜정씨도 온 몸이 다 젖었다. 다들 추워하긴 했지만 무리없이 촬영을 마쳤다"고 전했다.
< 양양=권영한 기자 champa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