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주
얼마 전 S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권모(28)씨는 60대 노신사에게 혼쭐이 났다. 에스프레소 주문을 받고 “손님, 에스프레소는 진한 커피 원액만 아주 조금 나오는 메뉴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다가 “늙었다고 무시하냐, 커피 이름도 모르고 사 먹는 줄 아느냐”는 호통을 들었기 때문이다.
“몇몇 메뉴는 손님들께 어떤 음료인지 설명을 꼭 하라고 교육을 받았다”는 권씨는 “어르신들 중에는 외국어라서 그런지 설명을 듣고 주문을 해도 나중에 원하던 음료나 사이즈가 아니라고 항의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원두 수입량을 기준으로 국민 한 사람 평균 288잔을 마셨을 만큼 커피는 일상화됐다. 하지만 영어가 서툰 노년층은 물론 커피를 즐기지 않는 일부 젊은이들에게도 ‘커피 주문’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윤모(60)씨는 “커피 자체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니까 이름은 어쩔 수 없어도 왜 사이즈까지 대중소도 아닌 숏, 톨 이라니”라며 “대학 나와서 불편없이 살았는데, 내 돈 주고 커피 사먹으면서 가슴 졸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강모(38)씨도 “커피 주문하다가 보면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린다”며 “멤버십 카드 업그레이드, ‘샷’ 추가, 테이크아웃 케리어(carrier) 등 거의 영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포털사이트에는 ‘커피전문점에 가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는 법’까지 올라와 있다. 한 네티즌은 “‘아메리카노 작은 사이즈 달라고 하면 무난하다’며 ‘점원이 모르는 말을 자꾸하면 그냥 오리지널로 주세요’라고 하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에서 파는 음료 50여개 중 우리말 메뉴는 ‘우유’ 하나 뿐이다.
‘먹거리 영어 스트레스’는 1990년대 중반 패밀리 레스토랑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TGI’, ‘베니건스’, ‘아웃백’ 등 음식점의 모든 메뉴는 외국어였고, 점원과의 대화도 ‘세팅(setting, 각 개인마다 주어지는 앞접시와 포크와 칼 등)’, ‘리필(다 먹은 음료수를 다시 채워주는 것)’ 등의 단어로 진행됐다. 계산서를 지칭할 때는 ‘빌지(bill+紙)’라는 정체 불명의 합성어까지 등장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영어 남용은 일본에서도 문제가 됐다. 아베 신조(安倍普三) 전 총리는 2006년 취임 직후 ‘패밀리 레스토랑’ 총리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아시아 게이트웨이(관문) 전략회의’, ‘신(新)건강 프런티어(첨단 분야) 전략회의’, ‘이노베이션(혁신)전략회의’ 등 외국어 회의체를 양산해 마치 영어 메뉴 투성이인 패밀리 레스토랑 같다는 것이다. 그는 첫 국회연설에서도 ‘프라이머리 밸런스(기초수지)’, ‘텔레워크(재택근무)’ 등 외국어를 109개나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도 계속돼 전국 1400여개 매장을 운영 중인 CJ푸드빌의 9개 브랜드는 모두 외국어다. 빵집은 ‘뚜레쥬르’, 커피전문점은 ‘투썸플레이스’, 아이크림집은 ‘콜드스톤크리머리’이고 한식 비빔밥을 파는 곳도 ‘카페소반’이다. 판매하는 메뉴들도 외국어 일색이어서 황모(33)씨는 “아이와 아이스크림집에 가서 ‘딸기는 없어요?’라고 물었다가 아이에게 ‘창피해서 아빠랑은 못 다니겠다’는 말을 들었다”며 씁쓸해 했다.
어린이들이 주로 사 먹는 과자 이름의 외국어 남용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한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생산 중인 과자 제품 449개 가운데 54.6%가 영어 등 외국어가 포함된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어와 외래어를 전혀 포함하지 않은 한글로만 된 과자 이름은 31.2%에 불과했다.
특히 ‘칩포테이토 오리지널’, ‘도도한 나쵸 오리지날’, ‘새우깡 미니팩’ 등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영어를 사용한 경우로 지적됐다. 아울러 매운 맛을 표현하기 위한 ‘핫(hot)’, 크기를 줄였다는 의미로 ‘미니(mini)’ 등의 외국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50년 넘게 과자를 생산해 온 오리온이 최근 내놓은 제품들도 모두 영어 이름이다. '마켓오' 관련 상품은 '워터크래커(Water Cracker)', '리얼 브라우니(Real Brownie)', '브래드칩(Bread Chip' 등이고, '닥터유' 계열은 '에너지바(Energy Bar)', '비스코티(Biscotti)', '라이스칩(Rice Chip)'으로 명명됐다.
하지만 과자를 주로 사 먹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영어 이름에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2007년 강원도 평창의 도성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학생 8명은 ‘과자 회사 사장님들에게 바랍니다’라는 청원을 한 포털에 올려 1000여명의 네티즌이 공감을 표시했다. 비슷한 시기에 초등학교 3~4학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79%가 ‘친숙하고 어떤 과자인지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우리말 이름을 선호했다.
국어 전문가들은 “상품명이 대부분 외국어, 외래어로 되어 있으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며 “이는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이어져 우리말을 경시하고 외래어를 중시하는 고정 관념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