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중에는 '작자 미상(未詳)' 혹은 '근거 불확실한 곡'이 많다. 오랜 추적 끝에 원곡(原曲)이 밝혀진 노래 가운데 대표적인 게 '갑돌이와 갑순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온돌야화'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사노라면'의 원곡은 '내일은 해가 뜬다'다. '몬테카를로의 추억'은 '못 잊을 부르스'이며 '어부의 노래'는 '황혼빛 오막살이'가 원곡이다. '예성강'은 '여기 이 사람들이', '여군 미스 리'는 '재건 데이트'다.
1978년 조경수가 '행복이란'이란 히트곡을 내놓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로 시작되는 노래다. '행복이란'은 조경수가 대학가에서 우연히 듣고 채보했다.
조경수는 원작자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작자 미상'으로 발표하려다 자기 딸 이름인 서연 작사·작곡으로 발표했다. 음반사측의 건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79년 본인의 곡이라고 주장한 인물이 나타났다.
이준례(당시 74세·작고) 여사다. 이씨는 본인 곡이라는 증거물로 직접 그린 친필 악보를 내놓았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2003년에 이 노래의 원저작자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시작됐다.
그것이 1964년에 발매된 음반 '임이여 나의 곁에'였다. 이 음반에는 노래 영화배우 김지미, 작사 월견초, 작곡·편곡은 유금춘으로 음반에 표기돼 있었다.
작곡가 유금춘(본명 김원출·2005년 작고)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행복이란'이 본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해 명의변경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사유서, 친필 악보, 음반 재킷 사본, 음원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런데 이 음반이 제작될 당시의 관련 인물들을 만나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먼저 이 음반이 나온 1964년은 김지미·최무룡 스타커플의 로맨스가 뉴욕타임스를 장식할 정도로 톱 이슈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음반은 김지미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그 유명세를 이용해 음반을 팔아보겠다는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지미씨는 음반 발매 제의를 완강히 거절했다.
그는 어느 각도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완벽하다는 미인의 대명사였다. 유일한 '사각(死角)'이 목소리였다. 당시 영화는 후시 녹음시대였다.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목소리는 성우들이 더빙으로 대신했다.
그 더빙이 무려 37편의 겹치기 출연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배우의 실제 목소리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다. 이 사각을 이용해 음반사측이 택한 게 바로 대리 취입이었던 것이다.
김지미 노래의 실제 목소리 주인공을 추적해봤다. 그 결과 김지미씨 사촌동생 김영자(66)씨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부각된 또 하나의 인물이 원작곡가라고 주장했던 이준례 여사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35년 '그리운 아리랑(선우일선 노래)' 등을 작곡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작곡가임이 확인됐다. '여성이 건방지게 작곡을 한다'는 당시 정서 때문에 이 여사는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뒤 이씨는 인형작가로 전업, 서울 초동에서 이준례 인형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했다. 이 인형연구소 옆집이 당시 김지미씨네가 운영하던 동진여관이었다. '임이여 나의 곁에'의 실제 목소리를 낸 김영자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준례 인형연구소, 기억이 나죠. 지미 언니네 집 바로 옆 건물이었기 때문에 언니들과 자주 놀러갔어요. 이준례 선생은 가끔씩 만돌린을 연주하며 그가 만든 노래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곤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