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마지막 편지 엽서 사진

지난 6월 21일 고미영의 장례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그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지난날 네팔에서 보낸 편지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많은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봄 시즌 등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3개 major봉 연속등반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에 자만하지 않고 14좌를 끝내는 그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지켜봐 주시고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카트만두에서 고미영 올림

봉투에 들어 있는 카드 한 장 가득히 쓴 그녀의 편지 전문이다. 카드 상단은 부겐빌리아로 보이는 분홍색 꽃을 배경으로 활짝 웃는 건강한 고미영의 상반신 사진이고, 하단은 설산을 배경으로 등반 중인 사진으로 그야말로 멋진 모습이다. 그리고 카드 중간에 '히말라야에서 미영이 인사드려요'라는 영문 한 줄이 쓰여 있다.

나는 아침에 아파트를 나서다가 고미영의 편지를 우체함에서 발견하고, 순간 북받치는 설움을 참으며 전철에 올랐다. 여느 때 같으면 차 안에서 보통 뜯어보는데, 이 날은 그런 마음이 아니어서 그대로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고미영의 편지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편지를 이제 어떻게 읽을 것이며, 그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망설여졌다. 나는 그저 울먹거렸다.

편지 속에서 고미영은 여전히 발랄하고 패기 있는 여성 산악인이지만 이제 그녀는 우리 곁에 없다. 고미영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자기 앞에는 히말라야 자이언트 완등이 머지않았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리라.

세상에 자기의 내일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스스로 속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고미영의 앞날은 밝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그것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고미영의 분향소를 열던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물론 장마철이었지만 나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를 그렇게만 보고 싶지 않았다. 고미영의 조난 소식에 놀라고 울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고미영은 왜 이렇게 가야만 했는가. 그녀는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던가.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녀야말로 누구보다도 멋지게 그 과제를 풀어 나가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그녀의 지금까지의 궤적이 말해주고 있다.

고미영은 우리 산악계에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났다. 스포츠클라이밍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6년 초오유가 그녀의 8,000m 고봉에 대한 도전의 시작이었는데, 내가 고미영에 주목한 것은 2009년 5월에서 6월 초에 이르는 그 40일간의 그녀의 행보다. 이 짧은 기간에 그녀는 마칼루·캉첸중가·다울라기리 등 3개 거봉을 연속해서 넘어섰다.

서구 등산계에 ‘Trilogy, 3부작’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개념과 고미영의 3부작은 질적으로 다르다. 서구의 등산 의식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엄하지만, 한국 고미영의 경우는 그들도 할 말이 없다고 본다.

나는 우리 산악계의 약점을 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로서의 강점이 있다. 높이 2,000m도 안 되는 자연조건하에 우리는 등산 후진국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갔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허점도 취약점도 많고, 그것 때문에 때로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고, 우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에베레스트 러시와 히말라야 자이언트에 대한 집념 등은 우리 산악계가 반성할 시점에 왔지만, 그것은 어차피 우리가 한번 부딪치고 넘어서야 할 산악계의 과제였다.

그러던 차에 고미영의 비보(悲報)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을 내가 더욱 가슴 아파하는 것은 죽지 않을 사람이 죽었다는 점이다. ‘죽음의 지대’를 누구 못지않게 아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고미영은 물론 자기의 정열과 의욕만을 믿었다. 1보 후퇴 2보 전진을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지난 6월 8일 다울라기리를 등정하고 일단 돌아와 쉬었어야 했다. 그때 네팔에서 파키스탄으로 직행한 것이 그녀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여기에는 고미영 본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그녀의 파트너도 책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판단과 자제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도 좋다. 문제는 낭가파르밧의 최종 캠프에 있다. 동행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최종 캠프가 제 구실을 못했다는 것이다.

1953년 마의 산 낭가를 헤르만 불이 단독 초등한 것은 역사에 빛나고 있다. 그때 불의 궤적은 50여 년 후 고미영의 경우와 대동소이하다. 최종 캠프를 떠나던 시간과 등정한 시간이며 하산에 걸린 시간이 모두 큰 차가 없다. <8,000미터 위와 아래>에는 그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당시 불이 겪은 시련은 한마디로 무섭다. 불이니까 그 죽음의 지대에서 살아남은 셈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친구가 기다리는 최종 캠프가 있었다. 둘이 들어가기에도 좁은 보잘것없는 천막이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산악인의 우정이 있었다.

나는 고미영이 겪었을 그 무렵의 사투(死鬪)를 눈물 속에 그려보았다. 오죽했으면 예쁜 외모와 달리 철갑을 입은 강인한 그녀가 갈 수밖에 없었겠는가.

고산등반, 특히 죽음의 지대에서 파트너십은 절대적이다. 이것은 산악인의 체력이나 기술 이상으로 필수적 조건이다. 자일을 생명줄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 우리는 박정헌의 등반기 으로 이미 구체적·현실적 사례를 알고 있다.

고미영의 죽음은 낭가 8,125m가 무리였다기보다는 등정 후가 부실했다고 생각한다. 헤르만 불의 경우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당시 불에게는 한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미영에게는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긴가. 누군가 옆에 있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고미영의 파트너가 사력을 다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결과는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미영과 파트너 김재수는 흔히 있는 자일파티가 아니었다. 숙명적으로 묶인,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밀접한 사이였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고 할 만한 깊은 사이였다. 그런 특수 관계가 고미영을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일약 히말라야 고소로 방향 전환을 꾀하게 하고, 그 짧은 기간에 8,000m급을 11봉이나 오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계도전은 등산 세계에서도 특수상황이며, 그래서 이러한 도전자를 산악계는 높이 평가한다. 이때 그는 결국 자기의 한계에 도전하는 셈이다.

나는 고미영이 무모했다기보다, 그녀가 자기와의 싸움을 끝까지 해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다만 그녀가 잠시 어느 시기에 귀국해서 충분한 휴식과 회복으로 재도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

나는 히말라야에서 오는 젊은이들의 편지를 이따금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소중한 자료임을 알면서도 책상머리에 오래 두지 않았다. 혹시 마지막 편지가 될까 두려워서다.

고미영은 원정길에 오르며 전화로 출국 인사를 하고,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도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물론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뒤 조난 소식을 듣는 순간 그 편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서 받은 편지가 결국 마지막 것이 됐다.

이제 나는 이 편지를 두고두고 보게 됐다. 앞으로 고미영은 그 웃는 얼굴로 언제나 내 곁에 있다. 그것이 나와 그녀와의 우정이고 사랑이다. 나는 고미영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나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