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가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지난 7월 22일 개봉한 후 한달만이다. '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에 이어 다섯번째다. 영화 제작단계에서 "코미디영화 감독이 재난영화를 만든다니 잘 되겠어?" 하는 비웃음까지 샀던 영화가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괴물'에 이어 두번째로 빠른 속도다. '해운대'의 어떤 점이 '1000만 클럽' 가입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 비결은 뭘까. 그 의미와 파장이 만만치 않다. |
가족애×멜로×CG×웃음×방학…흥행 대박 쓰나미 |
"재난 영화라기보다 휴먼드라마" 동질감 느껴 |
▶신선한 소재, 익숙한 공간
'해운대'는 국내 첫 재난영화다. 신선하다. 할리우드 재난영화는 많다. 하지만 국내 기술과 자본이 참여한 건 처음이다. 아이디어도 반짝 빛났다. 윤제균 감독은 인도네시아 쓰나미를 보면서 구상했다. "해운대에 쓰나미가 몰아닥친다면..."이라는 생각이 발단이 됐다. 해운대라는 유명 피서지가 영화의 공간이 되고, 제목이 된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가족애의 부각
'해운대'의 기본 테마는 가족애다. 천재지변인 쓰나미는 가족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연인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최만식(설경구)과 강연희(하지원)는 쓰나미 물결 속에서 전봇대에 매달려 손을 잡으려고 애쓰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유진(엄정화)은 물이 턱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딸의 생사만을 걱정한다. 노모가 관광을 포기하고 양아치 아들의 취직을 위해 산 구두가 둥둥 떠다닐 때, 관객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윤 감독은 "쓰나미만 있는 영화가 아니라, 쓰나미도 있는 영화다. 사람냄새 나는 영화다"라고 표현했다. 영화 곳곳에서 그 말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애는 1000만 관객 영화의 뿌리다. '괴물'(2006)은 괴물에게 납치된 딸(손녀 혹은 동생)을 구하기 위한 일가족의 눈물겨운 노력을 그린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형제애를 다룬다. 가족애는 연대감 혹은 동료애로 바꿀 수 있다. '왕의 남자'(2005)는 사당패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을 그리고, 최초의 1000만 관객 영화 '실미도'(2003)에는 이름조차 지워진 북파공작원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우정이 등장한다. 가족(동료)에 대한 사랑과 희생은 정 많고 감성적인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데 제격이다.
▶눈이 즐겁다...CG의 힘
'해운대'는 순제작비 130억원이 투입된 한국형 블록버스터다. 볼거리가 풍부하다. 500만달러나 쏟아부은 쓰나미 CG(컴퓨터그래픽)가 압권이다. '투모로우', '퍼펙트 스톰'의 CG를 담당한 한스 울릭과 국내업체 모팩이 합작했다. 할리우드 대작과 비교해 크게 손색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광안대교 콘테이너 붕괴 장면, 갈매기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박는 장면도 실감난다. 볼거리와 드라마가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들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인다. '괴물'과 '태극기 휘날리며'도 수준급 컴퓨터그래픽으로 관객들의 눈을 만족시켰다.
▶영웅 아닌 서민이 주인공
'해운대'는 작가주의 영화가 아니다. 상업영화다. 주요 관객들은 대중들이다. '해운대'는 재난영화지만 평범한 서민들이 주인공이다. 초능력에 가까운 힘으로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영웅은 없다. 만식과 연희는 횟집을 운영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형식(이민기)은 해수욕장 구조대원이고, 가짜 이대생 희미(강예원)은 방황하는 젊은이다. '해운대'는 이들의 사랑과 눈물을 보여준다. 재난영화라기보다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장삼이사들이 "바로 내 얘기 같다"고 감정이입할 수 있다.
'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역시 평범한 서민 혹은 아웃사이더들이 주인공이다. 자신을 비주류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들 영화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가벼운 웃음의 매력
'해운대'는 오락영화다. 웃음이 넘쳐난다. 코믹함은 윤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다. '두사부일체'와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을 통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웃음을 강조했다. '해운대'에서는 웃음의 강도와 빈도를 낮추고 드라마를 강조했다. 그런데도 곳곳에서 웃음이 넘실거린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배우' 설경구조차 능글맞은 부드러움과 애교를 보여준다.
웃음은 '해운대'와 기존 1000만 관객 영화의 최대 차이점이다. '괴물'을 포함한 4편의 영화에는 비장함, 한, 눈물과 같은 정서가 강했다. 동성애, 북파공작원, 전쟁 등 비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사회적 메시지도 강했다. 그러나 '해운대'는 가볍다. 올해 히트작인 '과속스캔들', '7급공무원'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회 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진다. 모든 국민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대다. 관객들은 묵직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보다 가볍고 따뜻한 웃음으로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는 영화를 찾는다. '해운대'는 가족애와 따뜻한 웃음으로 지친 관객을 위로해준다.
▶나 아닌 우리...팀워크의 힘
'해운대'에는 4명의 스타배우가 출연한다.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다. 이들은 한 명이 독보적으로 튀지 않는다. 홀로 빛나지 않는다. 단독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내공이 충분한데도, '해운대'에서는 힘을 빼고 영화 속에 녹아든다. 특히 박중훈은 생애 처음 조연으로 출연하며 자신을 낮췄다.
'왕의 남자'는 정반대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준기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이준기는 신드롬을 일으키며 1000만 관객의 일등공신이 됐다.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장동건과 원빈이라는 청춘스타를 앞세워 인기몰이를 했다.
▶방학은 블록버스터 시즌
마케팅 전략도 성공적이다. 블록버스터답게 최대 성수기인 방학 시즌에 맞춰 개봉했다. '해운대'는 가족관객을 대거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기존 1000만 관객 영화도 대개 방학 시즌에 개봉했다. '괴물'은 7월 말, '왕의 남자'와 '실미도'는 12월 말에 개봉했다. 장동건, 원빈을 앞세운 '태극기 휘날리며'는 봄방학인 2월에 개봉했다.
▶비빔밥같은 영화
'해운대'는 비빔밥같은 영화다. 드라마, 인물, 배우, 스펙터클 등이 조화를 이뤄 별미를 만들어 낸다. 각 요소들만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면, 사실 단점이 꽤 많다. 상투적이고, 작위적이고, 헐겁다. 캐릭터와 플롯이 특히 그렇다. 연희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이 바탕에 깔려 있는 만식과 연희의 멜로, 상가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너무나 익숙한 설정이다. 쓰나미 CG도 그것만으로 1000만 관객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디 워'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반면 '해운대'는 조금씩 부족한 듯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뤄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들
'해운대'는 상업영화로서 완성도가 꽤 높다. 드라마 전개는 별 무리없고, 배우들 연기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1000만 관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단점을 다 가릴 수는 없다. 술 취한 만식이 추태를 부리는 사직야구장 장면은 영화 흐름을 방해한다. 죽음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연희가 식기를 주워담는 장면도 상식을 벗어난다.
가족애, 화해를 강조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연출도 눈에 띈다. 김 휘와 유진은 딸을 헬기에 태워보낸 뒤, 쓰나미 앞에서 포옹하면서 화해한다. 형식은 자신을 괴롭히던 깡패를 살리려고 헬기에서 떨어져 쓰나미 속으로 추락한다. '착한 남자 콤플렉스'다. 이런 장면들이 맥락없이 돌출되면서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거액이 투입된 기획영화의 성공이 '블록버스터 만능주의'를 불러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