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수 문화부 기자·정치학 박사(조선시대정치사상)

국운(國運)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지금부터 160년 전인 1849년 6월 강화도에서 나뭇짐을 지던 한 젊은이가 조선 제25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사후 철종(哲宗·재위 1849~1863)이라는 묘호(廟號·임금이 죽은 뒤 받는 이름)를 받게 되는 열아홉 살 청년이다. 철종이 즉위한 직후 조정은 선왕(先王)인 헌종(憲宗)의 국상(國喪)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놓고 심각한 분열에 휩싸였다.

논쟁 과정은 조금 복잡하다. 국왕이 죽으면 종묘에 위패를 모시는데 중국의 제후국가로 자처하고 있는 조선은 오묘제(五廟制)를 택하고 있었다. 위패를 영원히 옮기지 않는 태조(太祖)를 중심으로 선왕 네 명의 위패가 좌우에 늘어서는 형태이다. 즉 시조(始祖)인 태조와 고조(高祖)-증조(曾祖)-조(祖)-부(父)인 선왕을 함께 모시는 것이다.

헌종이 죽었을 당시 종묘의 5묘는 '태조-진종(추존·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정조-순조-익종(추존·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이었다. 이제 헌종이 종묘에 들어가게 된다면 진종의 위패는 종묘 본전에서 부속 사당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작스럽게 즉위한 철종이 헌종보다 왕가의 항렬이 앞선다는 데 있었다. 정조의 이복형제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인 철종은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의 숙부뻘이었다.

신하들은 두 패로 나뉘어 치열하게 서로를 공박했다. 당시 권력가인 안동 김씨에 대항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은 친족의 순서인 '친서(親序)'를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증조부가 되므로 진종의 위패를 종묘 본전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선왕인 헌종의 위패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면 안동 김씨와 끈이 닿아 있는 사헌부·사간원 등의 관원들은 왕위 계통을 이은 '통서(統序)'로 따지면 "숙부가 조카를 이어 왕위에 오르더라도 부자관계가 된다"고 주장했다. 온 조정이 '국상 논쟁'으로 들썩거렸고, 결국 패배한 영의정 권돈인은 유배를 가고 정치생명이 끊어졌다. 이웃나라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불과 10여년 전 조선은 '친족의 순서'가 중요한가, '대통의 순서'가 중요한가를 놓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던 것이다.

이보다 약 170~180년 앞서 현종 때의 유명한 두 차례의 '예송(禮訟)' 역시 '친족의 순서'와 '대통의 순서'를 가지고 벌인 한바탕 정치논쟁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長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윤휴 등 남인은 대통을 이은 임금으로서 효종을 대우할 것을 주장했다. 국상을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단순한 예(禮)의 문제가 아니라 이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리는 '파워 게임'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이번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장으로 정해졌다. 이를 두고 원칙 없는 결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앞으로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합의도 없는 상태다. 1967년 제정된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은 제3조 '국장 및 국민장 대상자'에서 '대통령직에 있었던 자'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라고 애매하게 규정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분열될 소지는 다분하다. '대통령직에 있었던 자'라는 규정을 들어 전직 대통령을 모두 국장으로 해야 하는 것인지, 재직 시의 공과(功過)를 가려 국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나라가 또 한바탕 소용돌이칠 것이다. 5년마다 '전직'이 배출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나라를 기울게 할 수도 있는 분열의 소모전을 막으려면 국장 결정이 '파워 게임'이 아니라 법규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관련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