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말이 없다"
약 30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신`처럼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잘나가던 재미사업가`에서 당시 군사정권에 탄압받던 야당인사의 오른팔이 될 것을 자임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이다. 2001년 11월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자리를 떠나며 남긴 이 한마디는 이 남자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박지원.
아직도 그에겐 `국회의원`이라는 호칭보다 `비서실장`이 훨씬 더 어울린다. 꼭 맞는 옷 같은 느낌이다.
박지원 전 비서실장(현 민주당 의원)은 권노갑과 함께 대표적인 `김대중의 남자`로 꼽힌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을 말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실세 중 실세였다.
전남 진도출신인 그와 김대중의 인연은 1983년부터 시작된다. 그가 뉴욕 한인회장이던 당시 미국으로 망명 온 김대중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87년엔 급기야 미국생활을 접고 DJ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국내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잘나가던 재미사업가가 가혹하게 탄압받던 야당인사를 따라나섰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드라마틱한 대목이다.
박 의원은 92년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된 뒤 대변인과 언론특보 등 DJ의 언론관계 업무를 도맡았다. 야당 대변인 최장수 기록(4년1개월)을 세우기도 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출발해 문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으로 변신하며 김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다. 그에겐 자신의 삶보다 DJ의 삶이 더 우선해보였다. 아니 그의 삶은 DJ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DJ의 변함없는 신임에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내내 화려한 이력 속에서 살았으나 견제와 질시도 끊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권력`이 피해갈 수 없는 명암을 그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낙마와 재기의 반복이 그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 의원은 2000년 9월 한빛은행 불법대출 연루 의혹으로 야당 및 당 쇄신파로부터 퇴진압력을 받아 문광부 장관직에서 낙마했다가 반 년만인 2001년 3월 정책기획수석으로 재기했다.
그는 정책기획수석 시절 청와대 실세로 부각돼 `왕수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이후 몰아닥친 정풍파동 속에서 쇄신대상으로 지목됐고, 결국 같은 해 11월 DJ가 당 총재직을 사퇴하자 같은 날 미련없이 청와대를 떠났다.
수석을 그만둔 뒤 서울 시청 앞에 사무실을 내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으나, 석 달도 안 돼 정책특보란 이름으로 또 다시 부활했다. 이어 국민의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명명됐을 때는 "또 박지원이냐" "지겹다, 박지원"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에게 `DJ에게 믿을 사람은 오로지 박지원 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박 의원의 가장 아픈 시절은 그 어느 때보다 2003년부터 구속 수감됐을 때일 듯하다. 참여정부 때 실시된 `대북송금특검` 당시, 그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송금 과정에서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수감될 때 그는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 구절을 인용하며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고 했고, 사면됐을 때는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며 부활을 예고했다. 그리고 그는 부활했다.
구속되면서 억울함을 일관되게 호소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억울해하지 말고 이겨내라"며 그를 위로했다. 모함을 당한 충신에게 왕이 건네는 최고의 위로였으리라.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2002년 12월2일 비서실 월례조회서 박지원 당시 비서실장이 한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말이라는 시점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국정에 전념하고 있다는 의미였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DJ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DJ를 지키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83년 이후 그는 김대중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병원에서 DJ를 지킨 사람도 바로 그 `비서실장`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영원한 비서실장`, 오로지 DJ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정치인생,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온 강철같은 삶. 하지만 이런 그도 주군의 죽음 앞에선 잠시 고개를 떨구고 과거를, 지난 날을 돌아보고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