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맘대로 하세요."

독일 베를린에서 막을 올린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 출전 중인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장대의 재질에 대한 규정을 조직위에 물으면 이런 대답을 받게 될 것이다. 장대높이뛰기 종목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가 장대이지만, 그 재질과 규격에 아무 제한이 없다. 심지어 육상 릴레이 경기의 바통에도 길이(28~30㎝)와 무게(50g 이상) 규정이 있는데, 장대는 '엿장수 맘대로'다. 육상 규정집에는 "남의 장대를 빌릴 때는 (소유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장대 손잡이와 하단부에 테이프를 감을 수 있다"는 등의 상식적인 얘기만 나와 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최대 45m인 도움닫기 주로를 달려 장대를 박스에 꽂은 뒤, 휘어진 장대가 다시 펴지는 힘(탄성)을 이용해 크로스바를 넘어간다. 따라서 장대는 탄성이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초창기 선수들은 대나무를 썼고, 이후 알루미늄 금속 제품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선수들 대부분이 첨단 탄소섬유나 유리섬유 제품을 사용한다.

지난 1994년 남자 세계기록(6m14)을 세운 전설적인 장대높이뛰기의 1인자 세르게이 붑카(우크라이나)는 6m가 넘는 장대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대높이뛰기에는 "고체의 변형량(장대의 휘어짐)과 반발력(장대가 펴지는 힘)은 비례한다"는 '후크(Hooke)의 법칙'(17세기 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후크가 발견)이 적용된다. 같은 재질이라면 장대를 많이 휘게 하는 쪽이 더 높이 날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아무리 길고 탄성 좋은 '수퍼 장대'가 있어도 이를 충분히 구부릴 수 있는 스피드와 파워, 기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도움닫기의 스피드이다. 붑카의 경우 100m를 10초1에 끊을 만큼 스피드가 빨랐다. 100m 한국기록(10초34)보다도 빠르다. 여기다 장대를 박스에 꽂는 타이밍, 정확한 도약 순간 포착, 공중으로 솟구친 이후 상체의 힘으로 몸을 밀어올리는 능력 등이 일체가 돼야 좋은 기록이 나온다. 하나라도 안 되면 수퍼 장대를 써 봤자 기록은 고사하고 바닥에 추락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별도의 규정이 없더라도 선수는 자기에게 적합한 길이와 두께의 장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남자부에서 지금까지 6m를 넘은 '6미터 클럽'에 속한 선수는 붑카 등 모두 15명. 최근의 최고 스타는 스티븐 후커(호주)로, 지난해 실내경기에서 6m6을 기록해 붑카에 이어 가장 높이 날아오른 선수가 됐다. 여자 중에서는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가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5m5를 넘어 유일하게 5m의 벽을 돌파했다.

이신바예바는 18일 오전 1시45분(한국시각) 여자장대높이뛰기 결승전에서 세계선수권 3회 연속우승에 도전한다. 한국의 희망 임은지는 16일 예선에서 자신의 한국기록(4m35)보다 10㎝ 낮은 4m25에 3번 모두 실패하며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