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인재를 양성해주기 바랍니다.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란 제 꿈을 실현시키는 지름길이 바로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서전농원 김병호(金炳鎬·68) 회장이 KAIST에 3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발전기금으로 기부키로 하고 12일 KAIST 대강당 세미나실에서 '발전기금 약정식'을 가졌다. 작년 8월 한의학계 원로 류근철 박사가 578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데 이어 두 번째로 큰 금액이다.
KAIST에 고액을 기부한 사례는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2001년 300억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재미(在美) 사업가 박병준 회장이 1000만달러(당시 약 100억원), 닐 파팔라도(Neil Pappalardo) 미국 메디텍사(社) 회장이 250만달러(약 25억원)를 발전기금으로 내놓은 것으로 이어져 왔다.
김 회장이 내놓기로 한 부동산은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 가운데 대부분인 경기도 용인시 일원 임야·전답 등 26필지(9만4563㎡). KAIST는 김 회장과 협의해 발전기금 용처를 정할 방침이다. 또 김 회장 부부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신축될 IT융합센터 건물을 가칭 '김병호 IT융합센터'로 이름 붙이기로 했다. 한국실업테니스연맹 회장을 역임한 김 회장은 고향인 전북 부안군 '나누미 근농(根農) 장학재단'의 대표이사 등을 맡고 있다.
부인 김삼열(60)씨는 "남편은 5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다소 불편한 몸이지만 여전히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다"며 "이쑤시개 하나를 여덟 조각으로 쪼개 쓰고 휴지 한 장도 아낄 정도로 '바른생활 사나이'였다"고 전했다.
거액 기부를 결심하기까지 부인과 아들 등 가족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김 회장이 처음 기부 의사를 내비쳤을 때 가족들이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외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육은 시켜주겠지만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해왔다"며 "주저 없이 동의해준 아들과 부인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외아들 김세윤(36·카페 뎀셀브즈 대표)씨는 "아버지께서 평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씀해 오셨고 당신이 평생 노력해 얻으신 만큼 뜻대로 쓰시는 게 당연하다"며 "뜻깊은 기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17세에 76원을 들고 상경해 서울에서 식당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일하고 무섭게 절약했다"며 "무더운 여름날 1원을 아끼려고 남들이 다 사먹는 사카린 음료수조차 먹지 않았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
상경해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에 매달렸고, 이후 자동차 부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근검절약 하면서 34세에 결혼하기 전 서울 미아리에 작은 2층집을 마련했다. 이후 매사에 성실히 일하는 김씨 모습에, 알고 지내던 운수회사 사장이 버스를 외상으로 빌려줘 운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악착같이 재산을 모아 모두 땅을 사는 데 투자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88년 경기도 용인에 농장 터를 구입해 20여년 동안 농장을 운영해왔다.
이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김 회장의 형제간 우애와 교육에 대한 신념은 남달랐다. 7남매 중 장남으로 동생들 학업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본인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다. 1987년 부친상을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친척 자녀들의 등록금으로 내놓았다. 또 자신처럼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고향인 전북 부안군 '나누미 근농 장학재단'에 2005년 10억원의 장학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부지런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보배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김 회장은 "'버는 것은 기술이요, 쓰는 것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며 "돈을 후학 양성에 보태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아무 연고도 없는 KAIST에 선뜻 기증하게 된 계기에 대해 "신문과 방송에서 학교 개혁에 앞장서고 자신의 강의료와 상금까지 학교에 기증하는 서남표 총장의 모습을 보고 '이분에겐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난달 말 부인을 통해 KAIST에 기부 의사를 밝혔고, 지난 3일 KAIST를 찾아 서 총장으로부터 학교 비전을 듣고 연구활동 모습 등을 살핀 뒤 바로 거액을 기부키로 결심했다.
김 회장 가족의 기부정신은 이번만이 아니다. 김 회장의 아들 세윤씨가 1993년 서울대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할 당시 김 회장 부부와 세윤씨는 서울대 의대에 사후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김 회장은 "당시 시신이 부족해 의대생들이 연구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들이 명문대에 입학한 기념으로 가족들이 뜻을 모아 시신 기증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세윤씨는 지금도 매달 일정액을 유니세프 등에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KAIST발전재단 김수현 이사는 "김회장님이 어렵게 모은 재산을 순수한 일념으로 국가 장래를 위해 기부해 주신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남표 총장은 "김 회장님의 고귀한헌신과 기부는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감사패와 함께 나로호 우주발사체에 탑재될 인공위성2호 모형을 기념품으로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