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맑은 소리를 내며 공이 울렸다. 거구의 54세 한국인 남자 관장과 금발의 25세 미국인 여자 복서가 링 위에 섰다. 사제(師弟) 간의 스파링이다. 스승은 자신만만했다. 키 173㎝, 몸무게 90kg의 곰 같은 덩치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히죽 웃었다. "감히 복서 출신 형사를 이겨 보려고?"
그때였다. 자기 얼굴만한 복싱 글러브를 낀 제자가 스승의 왼쪽 입술에 '퍽!'하고 라이트훅을 명중시켰다. 순간 관장의 혓바닥에 피가 고였다. 관장이 간신히 눈뜨기 무섭게 얼굴과 관자놀이에 스트레이트와 훅이 작렬했다. 우쭐한 제자가 링 밖의 기자에게 떠들었다.
"어째 마우스피스를 안 끼시더니…. 경찰이라더니 별거 아니네요(He didn't have his mouthpiece on. Cop? That's nothing)."
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년에 살인범도 잡은 경찰을 감히…. 내 별명이 '반달곰'이야. 인마, 넌 내가 다운시킨다!" 관장이 제자의 얼굴에 스트레이트 두 방을 연속 명중시켰다. 휘청대는 제자의 복부에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제자가 다운된 순간 '땡!' 하고 공이 울렸다. 3분간의 '난투극'이 종료됐다.
지난달 29일 오후 7시 서울 강서구 화곡3동 '반달곰체육관'. 허름한 상가건물 지하에 있는 208㎡(63평)짜리 복싱 도장이다. 관장은 현직 경찰이자 아마추어 복서 출신인 신동선(김포국제공항경찰대 정보관)씨다. "30년 경찰 생활 중 13년을 강력계에서 보냈다"는 것이 신 관장의 자랑이다.
"조직폭력배와 살인범 등 700여명을 검거했어요. 내 손에 잡힌 범인이 '덩치 크고 날렵한 게 꼭 반달곰 같다'고 투덜거려서 '반달곰'이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이날 그에게 다운된 제자는 레이철 캘훈(Kalhoun·25·영어 강사)씨다. 2007년 3월 신씨가 체육관을 연 직후부터 다니고 있다. 반달곰체육관 관원 100여명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이다. 신 관장은 캘훈씨를 가리키며 "처음엔 '엄마 보고 싶다'고 외로워하던 애가 이젠 운동만 끝나면 '삼겹살 먹자'고 조른다"고 했다.
매일 오후 7시부터 밤 11시까지 신 관장이 제자들을 시시때때로 다운시키며 맹훈련하는 이유는 오는 9일로 성큼 다가온 전국생활체육 복싱토너먼트대회 때문이다. 신 관장은 이 대회 일반부와 여성부에 캘훈씨 등 수제자 8명을 내보낸다. 10대 고등학생, 30대 민항기 조종사와 고교 교사, 40대 7급 공무원 등 나이와 직업이 각양각색이다. 반달곰체육관에 다닌다는 걸 빼면 뭐라 한마디로 묶어 말하기 어려운 그룹이다.
이들을 한데 묶는 반달곰체육관은 일종의 비영리 사업장이다. 신 관장은 1980~1985년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하다 트레이너로 돌아섰다. 신 관장의 지인 7명이 사재(私財)를 모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15만원짜리 체육관을 차려줬다.
한 달 수강료는 5만원이지만 관원들이 실제로 내는 돈은 각자 형편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신 관장은 "350만원쯤 들어오면 임차료·전기료·수도료 내고, 사범 1명 월급 주고, 남은 돈 20만~30만원으로 어려운 집 아이들을 돕는다"고 했다.
이날 체육관은 '이얍' 하고 운동기구를 들어 올리는 사람, 거울을 노려보며 '섀도(shadow) 복싱'에 열중하는 사람, '휙휙' 줄넘기하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반달곰체육관 '에이스' 이진수(39·아시아나항공 부기장)씨는 1993년 공군 조종사로 출발해 16년간 하늘을 날았다. 그는 신참 조종사 시절 친한 동료가 비행사고로 사망한 뒤 복싱을 시작했다. "힘든 운동을 하면 괴로움이 잊히지 않을까 싶었지요."
2007년 4월 아시아나항공으로 옮긴 이씨는 반달곰체육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등록했다. 그는 "기내에서도 허공에 잽과 스트레이트를 뻗으며 연습한다"고 했다.
"작년 11월에 출전한 대회에서 일반부 미들급 준결승까지 이겼는데 회사에서 '더는 휴가 못 준다'고 해서 결승전에 못 나가고 공항으로 뛰어갔어요. 기권패 처리가 됐죠. 아내는 '올해도 나갔다가 회사에 찍히면 어떡하느냐'고 하지만…. 올해는 꼭 우승하고 비행할 겁니다."
밤 9시30분을 넘기자 관원들의 땀 냄새와 발 냄새가 곳곳에 진동했다. 김우석(35·덕원여고 영어교사)씨가 샤워실에 들어가 찬물이 콸콸 쏟아지는 샤워 꼭지에 맨발을 댔다.
"학생들 가르치려면 체력이 중요합니다. 내 몸이 건강해야 아이들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칠 수 있는 거지요. 링 위에서 느끼는 짜릿함도 좋지만, 링에 올라설 때까지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최고의 자기 수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모 구청 7급 공무원 김모(41)씨는 "16년 직장생활 끝에 많이 지쳤다"고 했다. 그는 2007년 "남들 때리며 스트레스라도 풀자"는 생각에 반달곰체육관을 찾았다. 신 관장은 첫날부터 김씨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작은 링에서도 푹푹 쓰러지는 게 사회에선 볼 만하겠다. 억눌린 게 있으면 폭발시켜 봐!"
김씨는 "복싱을 시작한 뒤 삶이 좀 밝아졌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구청'이라고 새긴 팬티를 입고 뛸 계획이다. "동료들이 알면 어떻게 하냐고요? '나 이렇게 새 인생 산다'고 하죠, 뭐."
밤 11시, 샤워를 마친 관원들이 하나둘씩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신 관장에게 몹시 얻어맞은 한 관원이 "내일은 제가 관장님 KO 시키겠다"고 으르렁댔다. 신 관장이 앞가슴에 큼직하게 '경찰'이라고 적힌 흰색 티셔츠를 벗으며 맞받아쳤다.
"'헤드기어'를 쓰면 상처가 잘 안 나. 하지만 느끼는 고통은 비슷하지. 계급장 떼고 서로 때리고 맞으면, 무척 아프지만 자기 인생에 도움이 돼. 이번 대회에서 최소 3명은 우승시킬 거야. 각자 자기 인생에서 뭔가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