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권영진 의원이 작년 10월 서울대 경력개발센터로부터 받은 '서울대 최근 5년간 미취업자 중 고시준비생 수' 국감자료에 따르면 올해 서울대를 졸업한 4267명 중 1272명(29%)이 미취업자로 조사됐다. 이 중 37%인 472명이 고시준비생이었다. 고시생, 그들은 누구인가?
서울대 인문대 01학번 장모(27)씨. 2005년부터 4년째 행정고시에 도전 중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바로 고시생의 길을 택했다. 전공인 역사학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미시경제학, 국제통상 등 고시 관련 수업으로 시간표를 채웠다. 2008년 8월에 학부를 졸업했으나 “백수”로 있기는 싫어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학적을 두고 있다.
1~2학년 때 장씨는 다양한 교양수업을 두루 수강하고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활달하고 호기심 많은 대학생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했고 혼자 석달 간 유럽으로 배낭여행도 다녀왔다.
복학 후엔 신림동 고시촌에 살며 ‘행정학 스터디’, ‘토익 스터디’에 열중했다. 외국여행은커녕 여름 휴가도 4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원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죠. 적성대로라면 PD가 되고 싶었어요. 7급 공무원 출신 아버지가 예전부터 ‘너는 꼭 고시 패스해서 고위 공무원이 돼라’고 은근히 압박을 주셨죠. 대학 들어와서는 어머니까지 너무 기대를 하셔서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기가 어려웠어요.”
이런 경우는 장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장씨의 학과 동기 22명 중 14명이 고시·공기업 시험을 본 적이 있거나 아직도 준비 중이다. 장씨에 따르면 그 중 최소한 10명은 “원치 않는 공부를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중”이다.
절반 이상의 고시·공무원 준비생들이 “주변의 권유와 압력 때문에” 또는 “남들이 하니까”라는 등의 수동적인 이유에서 이 길을 택한 것으로 조선닷컴 취재 결과 밝혀졌다. 조선닷컴이 신림동 고시촌과 신촌 일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시·공기업 준비생 100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명의 설문대상자 중 40%만이 스스로 선택해서 고시·공무원 준비를 시작했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부모(42%), 선생님(10%), 친구(8%)의 권유 순으로 나타났다. 60%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고시, 공기업, 국책은행 다 합해 봐야 1년에 고작 2000명 이하만이 합격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희망 인력은 비정상적으로 과잉 공급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른 분야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고시 낭인’ ‘낙오자’로 전락하는 등 개인적인 손해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인적자원 낭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의 한 관계자는 “5년 전만 해도 학생 혼자 찾아와서 상담하고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부모가 학생을 데리고 와서 자질이나 적성과 상관없이 등록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고 했다.
몇 년째 낙방해도 공부를 계속 하는 이유에 대해 30%의 응답자는 “주변의 기대치가 높아서 그만 둘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시·공무원 준비생의 3분의 1 가량이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자의와 상관 없이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는 얘기다.
행정고시 준비생인 연세대 02학번 A(27)씨는 "낙방 후 부모님께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가 일주일 동안 겸상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며 "부모님의 기대가 그만큼 엄청나서 섣불리 발을 빼지 못한다"고 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는 한모(28)씨는 “서울대 입학이 확정되자 가족들 사이에서 내가 사법고시를 보는 것도 자동 확정됐다”며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한씨는 “원래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서울대에 간 이상 집안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1학년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해왔다는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07학번 강모(21)씨는 “학교 입학하자마자 엄마가 ‘고시반에 들어가서 교재와 학습요령 등에 대해 알아두라’고 재촉했다”며 “대학 입학 전엔 수험생, 입학 후엔 고시생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박찬웅(44) 교수는 “고시·공기업 시험은 예전부터 워낙 선호하는 취업 유형”이라고 전제하고 “요즘 부모세대가 공직을 권하는 데는, 80년대 이후 극단적인 사회 현상이 이어지면서 대기업도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정성에 대한 희구라고 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