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이탈리아 성지(聖地)순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서울 한남동성당의 한 신자는 일행들의 출국신고서를 모아서 쓰고 있는 '가이드'에게 "항공사 마일리지 좀 적립해 달라"고 부탁하려다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한남동성당의 김형찬(43) 주임신부였다.

성당 신자 35명과 함께 8박10일의 성지순례를 계획한 김 신부는 각종 자료와 인터넷을 뒤지고 이탈리아 현지의 한인 가이드와 의논해 일정을 짰고 항공사 예약도 직접 했다. 일행은 김 신부의 안내에 따라 몬테 카시노·산 조반니 로톤도·란치아노·아시시·포르치운쿨라·시에나·볼세나·오르비에토·수비아코·디비노 아모레 등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지방을 'ㅁ'자 모양으로 돌면서 성지순례를 했다. 김 신부는 그 결과를 정리해 최근 《땅 위에는 하늘을 담은 곳이 있다》(주심출판사)를 펴냈다.

김형찬 신부(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한남동성당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적이 있는 이탈리아 아시시를 찾았다.

김 신부가 순례지로 고른 곳은 베네딕도(5세기)·프란치스코(1182~1226)·비오(1887~1968) 성인(聖人)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세 성인 모두 김 신부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생 시절 입대해 성직(聖職)에 대한 소신이 흔들릴 때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이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라는 전기였다. 또 군 생활을 마치고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인 솔뫼성지에서 6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 비디오를 통해 비오 성인을 만나 신앙을 굳건히 다지게 됐다. 서울 봉천8동성당 주임신부로 성당을 건축하던 시절 많은 어려움 가운데 마음을 의지한 대상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

이들의 일생을 되짚다 보니 현지 가이드들도 가보지 않은 곳들까지 포함됐다. 라 베르나·피에트렐치나 등이 그랬다. 마침 김 신부는 《성모님을 만난 성인들》이라는 책의 번역을 마쳐서 이해가 깊었다. 개인적인 사연과 성인들의 삶, 그리고 각 성지의 현재 모습이 얽혀 있는 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성 비오 신부의 비서였던 멜링고 신부에게 강복하는 김형찬 신부.

김 신부가 성지순례 전 준비를 철저하게 한 것은 솔뫼성지의 봉사활동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성지에 올 때에는 뜨거운 신앙심을 가졌던 분들이 돌아갈 때에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성지순례 문화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쇼핑이나 관광은 뒤로 미루고 성지마다 미사와 고해성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때로 불편할 법한 이런 순례가 계속되자 신자들도 변화했다. 날씨가 나빠도, 심지어 미사 도중 정전(停電)이 되어도 흔들림이 없었다. 김 신부는 "순례가 계속되면서 신자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묵상하는 등 변화돼 가는 모습을 보였다"며 "열심인 신자들을 목자(牧者)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순례단의 진지한 모습은 현지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비오 성인의 성지에서는 비오 성인의 비서를 지냈던 이탈리아인 신부가 김 신부에게 강복(降福)을 청했다. 보통은 방문이 어려운 곳도 이들 일행에게는 문을 열어줬다.

책을 펴내게 된 것도 신자들의 권유 때문이다. 김 신부는 "8순에 가까운 신자분이 순례 때 찍은 사진 수백장을 주셨다"며 "글을 쓴 것은 저이지만 이 순례기는 순례단 모두가 함께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