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부인 전은선씨와 함께 일본 여행 중.

20여 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을 생각하면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먼저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가고 있던 호텔의 빨간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수줍게 서성이고 있었던 소녀를 발견한 순간 난 세상이 환해짐을 느꼈다. 

얼굴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렸던 사람이 삶의 동반자가 되고, 엇갈렸던 첫 만남이 필연이 됐구나. 그날 우리는 선배의 주선으로 만남을 약속했지만 호텔의 같은 층, 다른 커피숍에서 서로를 기다렸었지. 휴대폰도 없었고 언제 올지 모르는 너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그 소녀를 봤고, 첫눈에 반했지.

너를 만나기 전 나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알다시피 나는 6형제 중 막내에다가 남자 중·고등학교를 나왔지. 기대를 품고 간 대학에서도 여학생과 어울릴 기회를 갖지 못했어. 학과 동기 65명 중 여자는 세 명뿐이었거든. 게다가 그 세 명도 나보다 남성다웠지. 그래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내재돼 있었나 봐.

너와 만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로 기억한다. 강릉으로 출장을 가 있던 나에게 너는 “파리로 유학을 가고 싶다”며 “허락해 달라”고 했지. 고민 끝에 너를 보내기로 했어. 반대했다가 앙금으로 남을 미안함이 싫었던 것 같아. 아내의 유학조차 자신을 위해 허락했을 만큼 난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보다. 지금도 그 성격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그렇게 파리로 간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지. 파리에 발을 딛고 느꼈던 바람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이국의 네 방에서는 외로움으로 응고된 고독의 향기가 났지. ‘아, 여자도 남자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구나’란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

네가 낯선 곳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느꼈을 외로움이 내가 지방에 가 있었을 때 느꼈을 감정과 같다는 것을. 여자도 외로울 땐 가끔 남자 동료와 어울려 술을 마실 수 있고, 바쁘면 미처 연락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를 만난 지 3년이 지나서야, 파리로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남들은 우리 부부를 ‘닭살 커플’이라고 하는 거 알지? 결혼 14년차인 우리가 알콩달콩 사니까 아직도 신혼으로 보이나 봐. 사람들이 부부싸움 안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어. “남북통일이나 보수냐 개혁이냐 등의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라면에 계란을 넣고 안 넣고의 문제로 다툰다”고.

너 유학 가 있을 때도 우리 참 많이 싸웠지. 파리에 있는 네가 전화로 신림동 만두랑 순대가 먹고 싶다고 하기에 당장 신림동에 가서 그것들을 사왔지. 너를 더욱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몰래 비행기표를 끊고 출국하기 직전 공항에서 전화했었어. 그러곤 “바쁜데 연락도 없이 왜 오느냐”는 너의 말이 섭섭해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싸웠지. 물론 비행기표가 아까워서 결국 갔지만 말이야.

파리에서 패션쇼 준비하는 너를 도와 2박3일 동안 스타일화에 묻어 있는 지우개 가루 털어주고 온 것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 유학 가 있는 동안 한 달 전화비가 80만원씩 나왔는데, 알고 있니? 하루는 전화국 직원이 해외사업하느냐고 묻더라. 그 무렵의 일들을 생각하니 아련하게 웃음이 번진다.

은선아, 너와 살면서 대화하고 맞춰 가며 사람을 알게 됐다. 사람이 왜 화를 내고 무엇을 생각하며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등 많은 걸 배웠어. 네가 지금 내 옆에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내 고집만 부리며 염세주의에 빠져 있었을 거야. 살지 않는 것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최선이라 생각했건만 이제는 삶에 지나친 애착이 생길까 봐 걱정될 정도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

미니시리즈를 제작하는 6개월 동안 하루에 꼬박 20시간 일을 하면서 두통이 오면 주머니에 있는 약을 습관처럼 먹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수면제를 복용하곤 했지만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 버틸 수 있었어. 잠이 깰까 봐 화장실 변기 물도 못 내리고 냉장고 문 여는 것 하나까지 조심스러워하는 너의 배려 덕분에 드라마 제작에 집중할 수 있었지. 나를 위해 크고 작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 드라마를 꼼꼼하게 모니터하며 격려해 주는 사람, 누구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 네가 있어 나는 든든하고 행복하다.

우리는 아이가 없으니까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결혼생활이 지루하겠지. 남들이 들으면 또 닭살이라 하겠지만 둘이 놀 때 정말 즐겁다. 손금 봐주기, 엽기적인 사진 찍어서 보내주기, 화분에 새싹 나면 물 주면서 대화하기, 누가 더 청소 잘했나 자랑하기, 같이 쇼핑하고 무작정 걸으며 이야기하기 등….

즐거움과 행복을 공유하는 방법은 찾아내기 나름인 것 같다. 우리가 함께한 지도 어느덧 14년이 됐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둘만의 약속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구나. 지금처럼 아무리 화가 나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잘 지키면서 살자.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오래된 친구처럼 곁에 있지만 네가 항상 새로워서 삶이 재밌다. 함께하는 세월 동안 더 여유로워지고 침착해지는 너의 모습을 발견하게 돼.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물론 가끔 발견하는 흰 머리카락까지도 새롭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공중전화 부스 앞의 소녀 같았던 그때보다 지금의 네가 더 예쁘다는 거야. 함께할수록 정말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죽기 전 너에게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너와의 '소풍'을 끝내고 가는 길, 당신 덕분에 이번 생이 즐거웠다고, 나 없이도 더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 주고 싶어. 남자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쓰고 싶은 곳에 돈도 쓰면서 네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은선아, 우린 앞으로도 서로에게 더 배우고 새롭게 보여줄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처럼 서로 토닥이며 배우고, 늘 새롭고 행복하게 그렇게 살자.

월간조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