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경기도 양주 한 예비군 훈련장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줄을 서 있는 예비군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우의를 입고 식당 처마 밑으로 늘어섰다.

중부 지방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던 14일 오후 경기도 양주의 한 예비군 훈련장. 실내 교육장에서 ‘전갈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동영상이 상영 중이었지만, 250여 명의 예비군 가운데 깨어 있는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고, 일부는 아예 앞 사람 의자 등받이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현역 훈련 조교들이 “선배님, 주무시면 안됩니다”라며 깨우고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날 계획됐던 각종 훈련이 ‘악천후 교육’으로 변경되면서 훈련에 참가한 500여 명 중 2개 학급 250여 명은 8시간교육을 계속 이렇게 보냈다. 2년차 예비군 최모(27·회사원)씨는 “왜 예비군들이 비가 오기를 원하는지 이제 알겠다”며 “하루 종일 앉아서 졸았더니 엉덩이와 목이 아플 정도”라고 말했다. 4년차 훈련을 왔다는 이모(26·자영업)씨도 “우천 시 실내 교육을 받아보기는 했는데, 오늘처럼 하루 종일 앉혀놓는 건 처음”이라며 “오후부터는 지루해서 동영상이라도 볼까 했는데 대부분 지난 봄 향방작계 때 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가 오면 예비군은 행복하다’는 건 예비군들 사이에서 오랜 상식이다. 동원 훈련은 물론 동원 미참가자의 출퇴근식 훈련도 우천 시에는 실내 교육으로 대체돼 ‘더욱’ 편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실내 공간이 확보되면 구급법 등의 시범식 교육이 진행되기도 하지만, 대다수 훈련장의 실내 교육시설은 참가 예비군이 모두 들어가 앉기에도 비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로 시행되는 것이 영상 기기를 이용한 시청각 교육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영상 교재 대부분이 너무 오래돼 재미가 없다는 게 예비군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 교관은 “예비군 훈련 자체가 느슨해 시청 태도가 불량하지만, 보여 주는 시청각 자료 역시 예전 영사기 시절 ‘비 내리는’ 영화가 생각날 정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날 상영된 10개 가까운 동영상 가운데 1년 이내에 만들어진 것은 한 개에 불과했다. 예비군 4년차라는 박모(27·학생)씨는 “매년 새로 만드는 것도 내용은 거기서 거기”라면서 “등장하는 아나운서만 노현정-강수정에서 김경란으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근래에 제작한 듯한 이 동영상에도 올해 초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등은 담겨있지 않았다. 특히 ‘전갈의...’ 영상은 2003년 북한의 NPT 탈퇴까지만 언급돼 제작된 지 5년 이상 지난 것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대에 다녀왔다는 김모(21·대학생)씨는 “정찰대 활동 관한 동영상은 흑백에 등장 인물 목소리도 없이 현장음만 들리는 게 TV에서만 보던 ‘대한늬우스’ 보는 기분이었다”며 “요새 영화관에서 틀어주는 ‘대한늬우스’처럼 만들면 좀 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재난상황 시 국민행동 요령’을 시청하던 윤모(25·운수업)씨도 “알아두면 요긴할 것 같아서 처음에는 열심히 봤는데 옛날 화면이 매번 똑같이 나오니까 볼 마음이 안 생긴다”며 “화면에 미도파 백화점 앞에 서 있는 연두색 좌석버스가 나오는데, 그건 1980년대 단종된 버스 모델”이라고 꼬집었다. 미도파 백화점도 2000년대 초반 롯데백화점이 인수하면서 사라졌다.

반면 오전과 오후 각각 1개씩 방영된 영국 BBC 제작의 ‘미래의 전쟁’과 ‘미래의 군인’ 다큐멘터리는 절반 이상이 관심있게 지켜봐 대조를 이루었다. 향후 전쟁의 양상과 신무기 등을 주제로 한 이 동영상은 한 편의 길이가 50분 정도였음에도 호응이 매우 좋았다.

정훈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는 박모(28)씨는 “새로운 시청각 자료에 집중력이 높은 것은 현역이나 예비군이나 마찬가지”라며 “매년 새로운 영상을 만들기는 어려우므로 군 관련 해외 자료를 구입해서 이용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했다. 상근 예비역으로 복무하면서 예비군 훈련 조교를 맡았었다는 김모(29·대학원생)씨도 “조교를 할 때 이따금씩 미국 외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상영하니까 조는 예비군이 한 명도 없었다”라며 “전쟁 영화나 관련 외화를 이용하는 교육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