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

미국프로야구 마이너리그출신으로 한국프로야구원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은 물론 투수3관왕, 그리고 초대 MVP까지 휩쓸었던 당대최고의 투수 박철순.

물론 원년의 맹활약에 이어 그 이후의 프로생활은 부상과 재기의 연속으로 힘겨운 선수생활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선수라기보다는 불사조라는 이미지가 더 어울리게 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박철순은 82년이전에도 순탄한 인생을 보낸 적이 없었을만큼 격랑의 인생을 보냈던 선수였다. OB베어스 입단이전의 박철순의 행보를 다시 되돌려보자.

박철순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시절, 뒤에 롯데감독이 되는 김용희 현해설위원과 선수생활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용희가 고려대 74학번이므로 박철순도 74학번이 되어야 하지만 그는 연세대 75학번이다.

고교를 무수히 옮겨다니는 중에 1년의 유급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철순은 부산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런저런 트러블로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된다. 이때 아예 부산을 떠나버렸던 그가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대전의 신생야구팀인 대성고에 2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대성고 야구부에 크나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지역예선 대전고와의 시합에서 대성고는 3학년 에이스였던 정성만의 역투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으나 8회이후 석연치않은 심판판정으로 역전패했고 격분한 대성고 야구부원들이 심판을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용서받지 못할 불상사로 대성고야구부는 중징계를 받아 야구부가 해체되고 당시 2학년 백업투수로 벤치를 지키던 박철순은 심판폭행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팀을 옮겨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박철순은 이후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역시 당시 신생팀이었던 충암고로 편입을 시도했지만 무산되면서 대신 배명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3학년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수차례의 전학 끝에 가까스로 고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빠른 볼을 가지고 있었던 박철순은 그 재능을 높이 산 연세대에 스카웃되지만 1학년시절 위궤양으로 거의 시합에 나가지 못했고 1년만에 연세대를 중퇴하고 입대를 선택한다.
당시 공군팀인 성무에서 박철순은 드디어 재능을 꽃피워 뛰어난 투수로 성장하게 되고 국가대표로까지 선발이 된다.

실업팀 롯데는 제대후 그를 스카웃하기위해 제대를 1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입단계약을 체결하고 급여까지 지급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규정상 아무리 제적상태여도 대학중퇴자가 실업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원소속 대학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연세대는 이미 대형투수로 성장한 그의 롯데행에 끝까지 동의서를 써주지 않으며 복학을 종용했다.

어떨 수 없이 연세대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 하지만 당시 연세대에는 국내최고의 투수 최동원이 있었다.
슈퍼스타로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최동원과 역시 불같은 성격의 박철순은 이내 신경전을 벌이게 되고 새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예비역 2학년 박철순이 3학년후배인 최동원에게 심한 기합을 주는 일이 일어나면서 최동원이 학교를 무단이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최동원은 학교를 옮기겠다는 실현성없는 주장을 고집하다가 근1년간 유니폼을 벗다시피했고 겨우 복귀한 시점이 가을에 벌어진 추계리그직전이었다. 그 사이 박철순은 최동원을 대신해 연세대 에이스를 맡으면서 활약했고 대학선발에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최동원이 복귀하면서 이번에는 박철순이 더 이상 연세대야구부에 있기 힘든 상황이 되어 결국 또다시 2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이후 박철순은 미국으로 진출한다. 바로 대학대표시절을 눈여겨본 미국 스카우트가 그에게 접촉한 것이고 이때는 연세대도 흔쾌히 허락하면서 박철순은 국내야구선수중 백인천, 이원국에 이어 세 번째로 해외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선수가 된다.

80년 밀워키 블루워즈 싱글 A팀에서 마이너생활을 시작한 박철순은 이후 1년만에 더블A로 승격했고 3년째인 82년에 트리플A팀으로 올라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을 무렵,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OB베어스가 그를 영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뒤에 얘기는 많이 알려진대로 원년 24승과 22연승의 신화를 이뤄내지만 이듬해부터 부상에 신음하면서 주춤하게 된다. 총 4번의 치명적인 허리디스크 부상과 한번의 아킬레스건 파열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때마다 투혼을 발휘하면서 재기, 햇수로 16년동안이나 OB(두산)의 유니폼을 입었고 누구보다도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어린 나이부터 남들이 겪지 못했던 방황을 겪었던 것을 시작으로 선수생활 내내 순탄치않았던 세월을 보냈던 박철순. 과연 불사조라는 별명에 가장 걸맞는 선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 최형석은 누구?

실업야구시절부터 한국프로야구의 시작,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30년 넘게 한국야구를 지켜온 열혈야구팬이다. 현재는 아마야구선수들과 프로팀 스카우트, 야구팬 등 약 7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커뮤니티 온라인 천리안아마야구사랑의 운영을 맡고 있으며, 마이크로탑10이라는 뉴스레터 발간사이트를 통해 약 2400명의 희망구독자에게 매일아침 프로야구에 관한 주요뉴스와 개인적인 소견을 정리하여 발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