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행정의 달인, 대한축구협회의 브레인, 정몽준 회장의 손발, 최고의 교섭가. 별명이 말해주듯 가삼현 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빼놓고 1990년 중반 이후 한국축구사를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외국인 감독 영입 등 주요 현안마다 짧게 깎은 머리의 그가 등장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중공업에 몸담고 있던 1993년 3월 회사로부터 축구협회에서 일하라는 인사 명령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처럼 4~5년쯤 파견근무를 한 뒤 친정으로 돌아갈 줄 알았단다. 그런데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 16년을 훌쩍 넘겼다.
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어 대외협력국장, 사무총장으로 있는 동안 축구는 그에게 종교이자 신앙이었다. 국제축구계에서 'SAM GA'라는 그의 영문 이름은 한국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통했다.
이달 초 가 전 총장은 현대중공업 선박영업부 임원이라는 새 명함을 받아들었다. 이제 총장이 아닌 상무로 불러달라는 그, 시간을 되돌려 축구인 가삼현의 입을 통해 그때 그 일들의 뒷얘기를 들어봤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영웅 거스 히딩크 감독은 가 전 총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2000년 1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나 직접 영입 협상을 했고,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찾을 때마다 두사람은 식사를 함께 하며 교분을 나누고 있다.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히딩크 감독은 휴전선 저편 북한에도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에게 기회가 되면 북한대표팀을 맡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물론 "여건이 허락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세계 최고의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히딩크 감독이 북한축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 전 총장은 히딩크 감독이 돈에 연연하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했다.
가 전 총장은 "그는 연봉 액수를 따라 다니는 지도자가 아닌, 가능성과 꿈을 찾아다니는 지도자였다. 북한 감독직에 관심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가 전 총장은 남-북이 통일되면 대표팀을 맡고 싶다는 뜻을 밝힌 히딩크 감독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히딩크 감독은 분단 현실과 북한축구 수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이 '축구 변방' 한국대표팀을 맡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가 전 총장은 "연봉 액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기준으로 봐도 큰 금액이 아니었다. 그가 돈만 봤다면 지난번에도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첼시에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2000년 말 가 전 총장은 대표팀의 새 수장 영입 작업을 위해 장기간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당시 협회가 영입 최우선 순위에 올린 지도자는 히딩크가 아닌 에메 자케 전 프랑스 감독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1998년 프랑스월드컵 정상으로 이끈 자케 감독은 시큰둥했다.
반면, 히딩크 감독은 시간과 돈, 두 가지 어려운 조건을 내밀어 당혹스럽게 했다.
그런데 그가 요구한 시간과 돈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대표팀 조련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강팀들과 해외에서 많은 경기를 하려면 적지않은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가 전 총장은 "일부에서는 거절하기 위해 일부러 수락하기 힘든 조건을 제시한게 아니냐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굉장히 영리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다. 나쁜 의미에서 계산적이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구상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치밀하게 꼼꼼하게 계산한다는 얘기다"고 했다.
가 전 총장은 "한국이 대회 개최국이고, 예선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히딩크 감독과 만난 뒤 가 전 총장은 계속 유럽에 머물며 요하네스 본프레레 등 차순위 감독 후보들을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히딩크 감독에게 기울어 있었다. 결국 협회가 히딩크 감독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가 전 총장은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5~6일이 지난 뒤 그로부터 한국팀을 맡겠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협회는 히딩크 감독에게 잔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계획이 있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 전 총장은 "히딩크 감독이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이룰게 없었고, 네덜란드인답게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