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 15일, 연세대 1학년에 다니던 18세 청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 청년을 데리고 가던 75세 미국 할머니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에게 말했다. "이제부턴 한국말을 할 수 없다." 그 말이 서글프고도 매정하게 들렸던 청년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언제까지요?" 대답은 단호했다. "네가 영어로 꿈을 꿀 수 있을 때까지(Until you can dream in English)."

이 미국인 할머니는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를 쓰기도 한 대문호 펄벅(Pearl S. Buck·1892~1973) 여사다. 청년은 펄벅 여사가 혼혈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설립한 펄벅 재단의 제1호 장학생으로 선발된 로버트 박(60·한국명 박철수)씨다.

9일 저녁,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박씨는 수십년 전 일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국 휴스턴에서 목사 일을 하면서 유학생들을 위한 영어 학교 교장으로도 근무 중인 그는 최근 재미 교포 월간지에 연재했던 미국식 영어 배우기에 대한 칼럼을 모아 '펄 S.벅에게 배운 미국 영어'(도서출판 금토)라는 책을 펴냈다.

로버트 박 목사.

필라델피아 교외의 펄벅 여사 자택에서 3년간 여사와 함께 살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박씨는 "내 영어의 토대는 펄벅 여사가 만들어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여사님은 제게 매일 단어 외우기, 발음하기, 듣기, 말하기 등을 맹훈련시켰어요. 같은 단어나 문장들을 수십 번 소리를 내어 반복해 읽게 했죠. 3개월 후, 마침내 영어로 꿈을 꾸게 되자 여사님이 말씀하셨죠. '네가 생각을 영어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한국말을 해도 된다'."

그는 펄벅 여사와 함께 재단 기금마련을 위해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여사로부터 '살아있는 영어'를 배웠다.

"미국에 온 첫해에 메인주로 여행을 갔어요. 바닷가재가 유명해 거의 매일 먹었는데 며칠 지나니 좀 질리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저녁엔 이탈리아 요리를 먹으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더니 여사께서 'Let's play it by ear'라고 대답하셨어요. 귀로 연주를 하자는 뜻인 줄 알고 의아해 여쭤보았더니 '그때 가서 결정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지요."

주한 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씨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편견에 가득 찬 주위의 시선, 급우들의 따돌림과 놀림…. 혼혈아인 그에게 한국생활은 상처투성이였다. 기회가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장학생으로 선발할 혼혈아를 찾고 있던 펄벅 여사와 인연이 닿아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소원이 뭐냐'고 묻기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난 여기서 미래가 없다'고요."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청년은 '소원'을 이뤘다.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은행에 들어가 은행장까지 지냈다. 그는 "펄벅 여사야말로 내 인생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일화요? 철없던 틴에이저 때라…. 19세 생일날 흰색 스포츠카를 깜짝 선물해주신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