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묘역 터 잡초 무성…류낙진은 전북 남원의가족묘지에 안장돼 있어…
나머지 5명의 유골은서울 구기동 사찰로 옮겨

2005년 5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보광사(普光寺) 입구에 '불굴의 통일 애국열사묘역'이 조성됐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주도해 만든 간첩과 빨치산 출신 비(非)전향 장기수를 추모하는 묘역이다. 그곳에는 류낙진·정순덕·금재성·최남규·손윤규·정대철 등 6명이 묻혀 있었다.

이런 사실이 7개월 뒤 알려졌다. 보수단체는 빨치산을 '애국통일열사'로, 남파 간첩을 '의사(義士)'로 표현한 데 대해 반발했다. 같은 해 12월 5일 보광사에 있던 빨치산과 남파 간첩의 무덤은 북파(北派) 공작원 출신 단체 회원들에 의해 부서졌다.

이들은 "간첩·빨치산이 의사·열사라니…" "남파 공작원은 영웅이고 북파 공작원은 역적이냐"고 흥분하며 해머를 휘둘러 비석을 깼다. 안내문과 묘지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렸다. 보광사 관계자와 비전향 장기수 관련 단체는 그 후 유골을 옮겼다. 어디로?

3년 반 뒤 다시 찾은 보광사의 당시 묘역 터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비석 잔해 하나 남겨지지 않았다. 처음 찾는 이들이 도저히 묘역(墓域)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실천불교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연우지비'(戀友之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그날 이후 유골들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도 궁금하다"고 했다. 경찰도, 파주시 관계자도 유골의 행방을 몰랐다. 보광사 관계자들은 "당시 주지였던 일문 스님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우리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생전 지냈던 시설과 단체에서도 모른다고 했다.

류낙진은 20세에 남로당에 입당했다. 6·25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암약하다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후일 호남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가석방됐다.

그는 다시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에도 그는 이적단체인 대표적인 종북(從北)단체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4월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고향인 전북 남원의 류씨 가족 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류낙진은 남원시 한적한 국도변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됐다.

국도변에서 조금 떨어진 양지 바른 야산 기슭에 조성된 묘역에는 류씨의 무덤을 포함해 6개의 작은 봉분이 있었다. 바로 건너편에 일가의 선산(先山)이 있다. 묘역 앞에 소나무 숲이 있어 도로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후손들이 자주 찾아 관리하는 듯 잔디가 짧고 주변도 정갈했다.

2005년 보광사 연화공원에 있던 류씨의 비석에는 '통일애국열사… 민족자주 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님!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리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2006년 9월 새로 만들었다는 검정 빛깔의 묘비에는 '학생영광류공낙진지묘(學生靈光柳公洛鎭之墓)' 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3년 전 비석이 깨지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봉변을 당한 탓인지 '통일운동'을 했다는 이력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비석 뒷면에는 가족들의 이름이 보였다.

한때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유골은 보광사 납골당인 영각전(靈覺殿)에 봉안돼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확인 결과 그곳에 있는 인물은 빨치산 정순덕과 전혀 무관한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다.

정순덕·금재성·최남규·손윤규·정대철 등 5명의 유골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사찰에 있었다.

정순덕ㆍ금재성ㆍ최남규ㆍ손윤규ㆍ정대철 등 5명의 유골이 봉안된 종로구 구기동 한 사 찰의 납골당.

산기슭에 있는 납골당은 600여기를 봉안할 수 있는 규모였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맨 아랫단에 이들 5명의 유골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남파 간첩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30여 년 동안 복역하다 2007년 사망한 맹기남의 이름도 보였다.

금빛 불상이 있는 작은 안치단은 소박했다. 연화공원 비석에 새겨졌던 '마지막 빨치산 여성 전사, 하나된 조국 산천의 봄 꽃으로 돌아 오소서'(정순덕), '조국 통일을 위해 투쟁하시다 비전향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친 열사 여기 잠들다'(손윤규) '30여년의 형옥 속에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당신의 지조를 지키며 빛나는 생을 마치다'(금재성) '29년의 감옥생활에서 지조를 지켜내신 민중의 벗'(최남규) 같은 비문 대신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사찰 관계자는 "돈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록해 놓지 않았다"며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유골은 고온으로 가열해 구슬 모양의 영옥(靈玉)으로 처리됐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서 "간혹 오는 사람도 (망자와) 어떤 관계인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