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은 1984년 펩시콜라 광고를 촬영하다 얼굴과 머리 부분에 화상을 입고 첫 성형수술을 했다. 이후 그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수술, 또 수술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펩시와 마이클 잭슨의 밀접한 관계는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됐다.
"80년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코카콜라를 마시는 사람과 펩시를 마시는 사람. 만약 당신이 마이클 잭슨 팬이었다면, 후자를 택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빌보드지)
1983년 '스릴러(Thriller)' 앨범이 나와 크게 성공하자 펩시콜라는 마이클 잭슨에게 500만달러를 주고 대대적 마케팅을 시작했다. 당시 음료시장에서 열세였던 펩시가 유색인종 잭슨을 선택한 것은 적절했다. '뉴 제너레이션' 캠페인은 코카콜라를 '낡은 것'으로 보이게 했고, 이듬해 펩시 매출은 77억달러로 늘었다. 펩시는 87년 '배드(Bad)' 앨범과 투어에는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대자본이 한 가수를 전폭 지원하는 모델은 비로소 그에게서 시작됐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와 콘서트는 더 크고, 화려해졌고 당시 신생 채널 MTV는 '마이클 잭슨'을 무한정 틀어댔다. 그의 노래는 MTV 혹은 MTV를 녹화하고 또 녹화한 테이프로 세계 각국에 퍼졌다. 부쿠레슈티 공연실황을 신촌, 홍대앞, 미사리, 그리고 베이징에서도 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콜라, 그리고 팝은 운동권 용어로 말하자면 '미 제국주의 문화식민주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미국 하류 문화의 침범으로 평가됐다. 스캔들과 기행은 이런 추악 이미지를 더 굳어지게 했다.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미 MIT대 국제학연구소장 존 터먼이 썼다)이라는 책에도 마이클 잭슨은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잭슨이 한국에 입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차례 무산 후, 마침내 공연이 허가된 96년에는 시민, 종교단체의 반대가 불처럼 일어났다. 경실련·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본부·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등 무려 49개 단체가 잭슨의 어린이 성추행 혐의, 외화 낭비 등을 이유로 "공연티켓을 판매대행하는 은행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은 잘 끝났지만, 손해를 본 공연 주최사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은행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압박해 계약을 깨도록 하고, 기획사에 손해를 끼친 것은 그 목적에 공익성이 있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소비자운동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적시하고, 선을 넘은 소비자 운동이 배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결정한 거의 첫 판례였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문화 키워드가 세계 곳곳에 남긴 발자취는 이뿐이 아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시(市)는 잭슨의 사망 직후 "도나 마르타(Dona Marta)에 그의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96년 뮤직비디오의 촬영지로 당시 마약 거점지였던 도나 마르타를 선택했다. 이후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이 빈민가는 환골탈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그는 '기록'을 만들었다. 백인 전용 라디오와 흑인 전용 방송이 트는 노래는 한 번도 겹친 적이 없었지만, 1994년 양쪽 모두 마이클 잭슨 노래를 내보내면서 처음으로 그 벽이 무너졌다.
대체 마이클 잭슨은 누구였고,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에게 그는 미국 문화식민주의의 마스코트였고, 어떤 이에겐 구원자였다. 그러나 어느 진영에 있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누구도 그처럼 노래하고, 그처럼 춤추지 못했다는 거다. 일부 먹물 지식인들과 인터넷 악플러들이 짓씹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언제나 춤추고 노래했다. 그의 죽음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문화의 힘이자, 오리지널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