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자 부엉이가 눈을 떴다. 24일 밤 8시,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동물원. 사파리 버스에서 마지막 손님 10여명이 내렸다. 괴괴한 수풀 속에서 호랑이 눈이 빛을 뿜었다.
사육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밤 9시까지 200여종 1000여마리를 숙사에 집어넣고 잠자리를 봐줘야 한다. 이 작업이 끝나자 사육사 81명 중 80명이 퇴근했다. 단 한명이 남았다. 서른 전후의 남자 사육사 22명이 매일 밤 번갈아 가면서 서는 '동물원 야간 당직' 때문이었다.
이날의 야간 당직자는 김정남(32) 사육사였다. 그는 폐장 시간 직후부터 동료들과 함께 '사파리월드' 맹수들을 우리에 넣기 시작했다. 사파리월드는 사자 37마리, 호랑이 33마리(백호 13마리 포함), 불곰 25마리, 하이에나 27마리 등 맹수 122마리를 풀어놓고 버스로 관람하게 하는 곳이다.
밤 8시10분, 실내 우리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곰들을 5개 침실로 밀어 넣는 '작전'이 시작됐다. 창문에 철망을 친 갤로퍼 한 대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곰들을 우리에 몰아붙였다. 우리마다 도르래 문이 달려 있었다. 문 위에 대기하던 사육사가 특정 곰들이 문 앞으로 쫓겨올 때마다 잽싸게 문을 열었다 닫았다. 이날 밤 '잠자리 파트너'를 정하는 작업이다.
박광월(49) 차장은 "동물들도 사람들처럼 친구가 있고 원수가 있다"며 "구별 없이 한 방에 재웠다간 '피'를 본다"고 했다. 사육사들이 동물의 성격과 서열에 따라 사이좋은 동성, 금슬 좋은 이성 중심으로 룸메이트를 정한다. 호랑이, 백호, 사자, 하이에나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침실에 들어갔다.
밤 9시, 다른 사육사들이 퇴근하고 김 사육사만 남았다. 엄밀히 말해 '혼자'는 아니다. 밤의 동물원에는 보안업체 직원 외에도 시설 보수 공사를 하는 인부와 안무 연습을 하는 공연단원 등 10여명이 남는다. 그러나 동물원의 안전을 '총괄 책임'지는 사람은 야간 당직자다. 이튿날 아침 9시까지 200여종 1000여마리가 잠든 30개 동물사를 샅샅이 돌며 동물들이 제대로 우리에 들어 있는지, 보안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아픈 동물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야행동물들의 끼니를 챙기는 것도 큰 일이다.
김 사육사가 사파리월드 맹수 우리에 들어섰다. 그가 두꺼운 자물쇠가 채워진 삼중 쇠창살 문을 열고 실내 우리 안에 들어서자, 퀴퀴한 짐승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핏물이 빠진 통닭을 우적우적 씹어먹던 사자와 호랑이들이 눈을 치켜떴다. 우리 창살에서 40㎝쯤 떨어진 바닥에 노란 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 선을 밟자, 김 사육사가 화들짝 놀라며 "당장 몸을 빼라"고 잡아끌었다.
이 선은 맹수들의 접근으로부터 안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은 '안전선'이다. 맹수 실내 우리에는 눈 닿는 곳마다 '야생동물은 애완동물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오랫동안 돌보다 정들 때를 경계하자는 의미다. 아무리 착해 보여도 맹수는 맹수다.
10여m 떨어진 외딴곳에 별도 우리가 있었다. 출산을 앞뒀거나 갓 몸을 푼 '임산부 맹수'들이 들어 있었다. 네 살짜리 암호랑이 '들호'도 이곳에 있다. 동갑내기 수사자 '레오'와 사랑에 빠진 들호는 다음 달 라이거(수사자와 암호랑이의 새끼)를 분만할 예정이다.
밤 10시30분, 김 사육사가 야행동물 우리로 갔다. 수리부엉이 3마리가 '사악'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흰 똥이 찍찍 떨어졌다. 수리부엉이는 국내 올빼미과 맹금류 중 가장 덩치가 크다. 쥐와 토끼의 천적이다. 김 사육사가 토막 낸 닭고기를 줬다. 수리부엉이는 사람을 가렸다. 김 사육사가 주는 것만 먹고, 낯선 기자가 내미는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밤 11시부터 30개 동물사를 도는 야간 순찰이 시작됐다. 관람객 동선과 달리 사육사들은 '사육사 동선'으로 다닌다. 숲과 동산을 가로지르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인 우리 뒤편을 질러간다. 그래도 한 바퀴 도는 데 꼬박 2시간이 걸린다.
김 사육사는 북극곰·펭귄 등의 숙소에서는 온도 조절 장치부터 살폈다. 물왕도마뱀이나 버마비단구렁이, 샴악어 등도 온도에 민감하다. 체온이 외부 온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보안 장치도 꼼꼼히 점검했다. 동물 탈출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동물원에서는 매년 동물 탈출 사고 상황을 가정해 분기별로 모의 훈련을 한다.
아픈 동물 간호와 응급처치도 야간 당직자 몫이다. 뒷발에 난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욕창이 생긴 캥거루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규칙적으로 수면 자세를 바꿔줘야 할 때도 있다. 호흡 곤란을 겪는 물개를 붙들고 '입 대(對)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기도 한다.
한밤중이 되자,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이 동물원을 덮었다. 김 사육사는 "동물들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가능한 손전등을 켜지 않는다"고 했다. 야간 당직자들은 "천둥 번개 치는 밤, 사파리 맹수들 122마리가 잠든 실내 우리 옆을 지날 때가 가장 꺼림칙하다"고 입을 모았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이 '꺼림칙한 코스'가 순찰의 마지막 순서였다.
김 사육사가 우리 곁을 지나자 사자와 호랑이 70마리가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곰들이 앞발로 우리 문을 탕탕 두드렸다. 하이에나들은 특유의 괴기스러운 소리를 냈다. "히히하하호호!"
사자·호랑이·곰·하이에나의 사중창에 머리가 쭈뼛 섰다. 김 사육사는 "사람들이 수다 떨듯 동물들도 자기네끼리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새벽 2시, 김 사육사는 숙직실에 돌아와 유니폼을 입은 채 짧게 눈을 붙였다. 그는 3시간 뒤인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번 더 순찰을 돈 뒤 오전 9시쯤 동물들이 어슬렁거리며 야외 방사장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퇴근했다. 권수완 에버랜드 동물원장은 "먹이를 먹고, 새끼를 낳고, 새끼를 만드는 동물들의 '역사'가 대개 밤이나 이른 새벽에 이뤄진다"며 "이 '역사'가 무사히 이뤄질 수 있게 지키는 것이 동물원 야간 당직자의 임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