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은 단순한 팝 가수를 넘어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흑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국적, 세대 계층을 막론하고 세계 음악 역사를 바꿔놓고, 흑인의 시대를 연 '음악 영웅' '흑인영웅'이 세상을 떠났다.
지구촌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누구보다 불행하기도 했던 스타 중의 스타가 영원한 별이 됐다.
마이클 잭슨의 팝 가수로서의 위치는 '킹 어브 팝'이라는 수식어가 모든 걸 설명한다. 그와 비견될만한 스타로는 60년대 비틀스, 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팬들이 느끼는 체감 인기는 마이클 잭슨 이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4명의 형들과 함께 구성한 '잭슨파이브'에 참여, 아역스타로서 맹활약했다. 그러다 잭슨파이브와 결별, 1979년 펴낸 첫 솔로앨범 '오프 더 월'이 1000만장 이상 팔리면서 잭슨 시대를 열었다.1982년 발매한 '스릴러'는 5000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고, 87년 '배드'는 2000만장, 91년 '데인저러스'는 2100만장 등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팔린 그의 앨범이 비공식적으로는 7억5000만장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클 잭슨의 스타덤은 십수년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사회 현상이 됐다.
국적을 막론하고 많은 가수들이 그의 음악과 춤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노래와 춤, 사운드와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트렌드, MTV로 대변되는 뮤직 비디오 시대도 그가 처음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마이클 잭슨 이후의 가요 역사는 많은 후배들이 마이클 잭슨의 경이로운 춤과 놀라운 가창력을 찬미하는 법을 각자 배우는 시간이었다.
국내 가요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쳐 '스릴러춤'나 '문워크춤'을 한번쯤 따라 추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팝칼럼니스트 임진모씨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하면 춤만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건 큰 오해다. 그는 굉장히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고 강조하면서 "비트 감각이 없으면 댄스음악을 소화하기 어렵다. 타고난 비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였다"고 회상했다.
작은 별 가족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밀리 그룹이 부른 '나의 작은 꿈'이라는 노래는 '인 어 스몰 웨이'라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번안한 것이었다고. 록의 황제 서태지도 실은 마이클 잭슨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음악 세계와 접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이클 잭슨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신비주의. 전 세계 스타 중 거의 최초로 은둔형 스타였으며 감춰진 자기 세계에서 사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식의 은둔이 많은 스타들에게 영감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그는 월드 트렌드 세터였다.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시사주간지의 모델로 연예인이 등장하는 시대도 마이클 잭슨이 처음 열었다.
임씨는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음악영웅이기도 했지만 세상을 바꾼 흑인영웅이었다는 점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잭슨이나 마이큰 조던 등이 흑인도 백인과 당당히 맞서는 우수한 인종이라는 걸 보여줬고 흑인들의 가치관을 바꿔놨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에게 닥친 개인적인 불행들은 그의 음악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됐다. 수술 후유증, 재정적인 파산, 어린이 성추행 관련 법정 투쟁 등 우울한 10년을 보냈고 그게 결국은 이번 죽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그가 유가족에게는 1억6000만달러의 빚을 남기고 갔다는 점은 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