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79세로 사망한 영화배우 도금봉(都琴峯)은 생전 "내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수녀들이 "천하의 도금봉 아닙니까. 돌아가시면 꼭 영화인장(葬)으로 치러야죠" 하면 그는 "아니야, 아니야. 그냥 알리지 말아줘" 하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진 도금봉은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을 만났다. 영화계 선배 최은희가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세례명이 '정옥순 다리아'인 도금봉은 3일 오후 8시58분 수녀들과 봉사자들의 기도 속에서 저세상으로 떠났다.

5일 한 인터넷 매체가 그의 죽음을 알렸지만 생전 그의 예견처럼 빈소를 찾은 영화계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화 '황진이'(1957)로 데뷔해 '유관순'(195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월하(月下)의 공동묘지'(1967) 등 500여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 길을 지킨 사람은 뒤늦게 만난 가족과 2005년부터 함께 생활해 온 천주교 복지시설의 수녀, 자원봉사자들뿐이었다.

6일 오전 발인할 때 유족들은 그의 영정 사진을 한지(韓紙)로 가리고 나갔다.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희귀 비디오 전문점 청춘극장의 안규찬 대표는 "영화계에서 보낸 조화(弔花) 하나 없는 빈소였다"고 씁쓸해했다. 영화 연구가인 정종화씨는 "작년 최진실의 사망 때를 돌아보라"면서 "영화인, 영화 팬들이 도금봉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했다.

도금봉이 건국대병원을 찾은 것은 5월 25일이었다. 감기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도 여주의 수녀원을 찾아 나물거리를 뜯고 올 정도로 건강해서 2~3일 입원하면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 길이 됐다.

입원한 도금봉의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자 수녀들은 그의 가족을 수소문했다. 그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그는 악극단 대표, 작고한 원로 액션배우, 육군 장성, 전 프로복싱 동양 미들급 챔피언, 당대의 미남 배우, 연하의 작곡가 겸 가수 같은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동거해 화제가 됐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왼쪽부터)남정임 / 이민자

80년대 중반 간간이 TV에 나왔고 1997년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에 출연했지만 도금봉은 삼청동에서 운영하던 복집을 접으면서 세상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었다. 음식점을 그만두고 복지시설에 인연이 닿기까지 도금봉의 인생 행적은 아직도 미궁(迷宮)에 빠져 있다.

도금봉은 왜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을까. 영화평론가 심영섭(대구사이버대 교수)씨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성기의 모습으로 대중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겨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면서 "나르시시즘의 일종"이라고 했다.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던 그레타 가르보가 인기 절정인 30대 중반 은퇴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언론·대중과의 접촉을 완벽히 끊은 것이나 심은하의 철저한 '신비주의' 고수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 왕년의 톱스타가 적지 않습니다.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사생활에 부침(浮沈)이 있을 경우 더욱 철저하게 숨어 살게 됩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이들에게 '가면(假面)으로서의 자아와 실제 자아와의 불화'는 견딜 수 없이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도금봉 선생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심영섭)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히로인들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60년대 후반 윤정희·문희와 함께 트로이카 여배우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유정'(1966)부터 '웃음소리'(1978)까지 250여편에 출연했던 남정임(南貞姙)은 4년간의 유방암 투병 끝에 1992년 9월 2일 47세의 나이로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혼과 이혼, 자해와 음독 사건 등 곡절이 많은 30대를 보낸 남정임은 외롭게 암과 싸우며 "건강을 회복한 뒤 투병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소망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서 연하의 청년 신성일과 정사를 벌이는 마담역으로 출연해 인기를 모은 이민자(李民子)는 1986년 1월 19일 뇌일혈로 숨졌다. '미망인 전문 배우'라는 별칭 때문이었는지, 그의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영화배우 김진규와의 결혼 생활이 14년 만에 파경을 맞았고 일본에서 재혼해 사업을 벌였으나 고혈압으로 쓰러져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재일교포와 재혼하며 현해탄을 건넌 지 18년 만에 차디찬 시신이 돼 고국을 찾은 것이다.

'애정산맥'(1953) '애인'(1956) '고려장'(1963) 등 400여편에 출연하며 50~60년대 정상의 인기를 누린 주증녀(朱曾女)는 1980년 9월 18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인생도 20년 동안 살던 남편과의 이혼, 각종 스캔들로 순탄치 않았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투병하던 그는 "낙화된 벚꽃을 달래듯 스스로를 달래며 살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