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어느 일요일 대학생 커플 양지예(21)·이영찬(22)씨는 아침부터 다급하게 길을 나섰다. 전날 밤을 함께하며 피임을 하지 않은 게 계속 맘에 걸렸던 것. 어디선가 응급피임약을 복용하면 임신을 피할 수 있단 얘기를 들은 두 사람은 인근 산부인과와 약국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휴일이라 그런지 문 연 곳은 거의 없었다. 택시를 타고 모텔이 즐비한 이웃동네까지 찾아간 끝에 어렵사리 문을 연 약국을 찾았다. 그러나 약사는 고개를 저었다. ‘단속기간이라 처방전 없이 약 팔면 큰일난다’는 것이었다. 처방전을 구하긴 더더욱 어려웠다. 대부분의 산부인과가 응급분만실 외엔 문을 닫아 진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이 커플은 불안한 맘에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아침 양씨는 학교 주변 산부인과를 찾았고 간단한 진료 후 처방전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피임약 복용 후 일주일 안에 생리 같은 출혈이 있으면 피임에 성공한 것”이라며 “생리가 없으면 다시 병원에 오거나 임신 테스트기를 써서 임신 여부를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양씨는 의사의 말을 대수롭잖게 넘겼다. 피임약을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방심한 것이다. 한 달 후 생리예정일이 지난 걸 뒤늦게 눈치챘다. 결국 남자친구 이씨를 보호자로 세워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일반 약보다 농도 5~6배 높아 부작용 우려
법적으론 전문의 처방전 받아야만 구입 가능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postcoital contraception)은 ‘모닝애프터필(morning after pill)’이란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주성분은 레보노르게스트렐. 본래 임신을 촉진하는 프로게스테론의 일종이지만 대량으로 공급하면 오히려 임신을 방해한다. 배란일 전에 복용하면 배란이 지연되며 배란일 후에 복용하면 자궁점막의 환경을 변화시켜 착상을 어렵게 한다.
생리주기를 감안해 규칙적으로 복용하는 일반피임약과 달리 응급피임약은 원치 않은 성관계 직후 복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성호르몬과 항체호르몬이 섞여 있는 일반피임약은 용법과 용량을 지켜 복용하면 피임 성공률이 99%에 이르며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생리주기가 28일인 경우 생리 첫날부터 21일간 매일 한 알씩 복용하고 나머지 7일간 복용을 쉬는 방법으로 임신을 피할 수 있다.
반면 응급피임약은 항체호르몬으로만 구성되며 일반피임약보다 농도가 5~6배 높다. 다량의 호르몬을 한꺼번에 복용해야 하므로 신체적 부담과 부작용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일반피임약과 달리 전문의와 상담을 거쳐 처방전을 받아야 구입할 수 있다. 가임기간(배란일 전 7일에서 배란일 후 1일 사이) 중 복용을 기준으로 피임 성공률은 성관계 후 24시간 이내 95%, 48시간 이내 85%, 72시간 이내 58% 수준이다. 3일이 지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응급피임약은 낙태약과는 다른 개념이다. 외국에서 주로 판매되는 낙태약은 임신 유지에 필요한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틴의 작용을 방해하는 성분으로 제조된다. 임신 12주 이내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응급피임약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건 지난 1998년. 청소년 성상담종합사업의 하나로 독일에서 제품 일부가 수입돼 보급됐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식 판매허가가 이뤄진 건 2001년 프랑스 HRA 파르마사가 개발한 ‘노레보정’이 수입되면서부터다. 현재는 노레보정의 특허계약이 만료되며 국내 제약업계도 응급피임약 시장에 뛰어든 상태다. 공식적으로 시판되는 제품은 5~6종이다.
응급피임약 시장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의약품 전문 조사기관 IMS데이터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연도별 매출액은 2002년 13억원에서 2006년 34억원, 2008년 41억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응급’ 의약품으로 허가된 당초 취지와 달리 ‘일반’ 의약품 수준으로 급속하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 10명 중 3명은 응급피임약 사용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산부인과 전문의 모임 피임연구회의 통계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주이용 계층은 20대 미혼여성이다. 지난해 이 연구회 소속 병원을 통해 응급피임약을 처방 받은 환자는 20대가 66.7%, 미혼여성이 83%인 걸로 나타났다. 응급피임약의 상당수가 준비 없이 가진 성관계의 ‘뒷감당’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12곳 방문, 10곳서 처방전 없이도 구매
1만~1만5000원짜리를 5만원 요구한 곳도
응급피임약을 찾는 여성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유통시스템은 주먹구구식이다. 가장 큰 문제는 처방전 없이도 얼마든지 응급피임약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24일 서울 종로구 송현동 A약국을 찾았다. 응급피임약을 구한다고 하자 약사는 주저없이 노레보정을 건넸다. 처방전 소지 여부는 묻지도 않았다. 신촌과 강남 일대 약국 10곳에서도 처방전 없이 응급피임약을 구할 수 있었다. 무작위로 선정한 도로 주변과 아파트 단지 내 약국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문이 닫혀 있어 처방전을 못 구했다”고 하자 12곳 중 4곳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피임약을 건넸다. 6곳에선 조금 망설이다가 “응급피임약은 먹는 시간이 중요하다”며 제품을 내놓았다. “처방전 없인 절대로 못 판다”며 판매를 거부한 곳은 2곳에 불과했다.
응급피임약의 정상가격은 1알에 1만~1만5000원 선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 처방전 없이 찾아온 고객의 약점을 잡아 최대 5만원까지 값을 올려 받는 약사도 있었다. 응급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있어 가격정찰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가격 대비 약효에 따라 건강관리공단이 부정기적으로 약값을 상시 조정하는 것.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응급피임약 가격은 이런 구조에서 비롯된다. 대학생 양모(22)씨는 처방전 없이 응급피임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찾은 경험이 서너 번 있다. 그는 “처방전을 구하기 힘든 토요일 밤 같은 땐 약사가 선심 쓰듯 약을 건네며 웃돈을 요구하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20곳 중 14곳 “보호자가 대신 와도 무관”
주말 휴진 많아 제때 처방 받기도 어려워
응급피임약 처방권을 가진 병원도 문제가 많다. 처방전은 본인이 직접 병원을 찾아 요청해야 발급되는 게 원칙. 그러나 취재진이 서울 성북·종로·노원구 일대 산부인과 20곳을 무작위로 선정해 “보호자가 대신 처방전을 끊을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결과 14개 병원으로부터 “직접 오는 게 좋지만 정 힘들면 보호자라도 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직접 와서 간단한 진료를 끝내야 처방전을 줄 수 있다”고 응답한 곳은 6곳에 불과했다. 일부 병원에선 “초진기록만 있으면 누가 오든 상관없다”고 하기도 했다. 병원들이 처방전을 제대로 발급했는지에 대한 추적도 불가능하다. 응급피임약은 보험적용 제외 품목이기 때문이다.
한모(22)씨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후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응급피임약 처방전을 떼러 갔을 뿐인데 병원 측에서 성관계 당시의 정황을 꼬치꼬치 묻고 임신 판별을 위한 초음파 검사까지 강제로 권한 것. 비용을 치르고 나오면서도 그는 내내 바가지 썼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대학생 백모(23)씨는 임신이 됐을까 봐 염려하는 여자친구를 위해 응급피임약을 사본 경험이 있다. 그는 “병원에 처방전을 떼러 갔는데 여자친구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라고 해서 놀랐고 엉터리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썼는데도 처방전을 떼어줘 또 한번 놀랐다”고 말했다.
처방전 가격도 제각각이다. 병원에 따라 적게는 1만원, 많게는 2만원까지 차이가 난다. 처방전 가격은 의사면허를 소지한 발급자의 권한이어서 문제 제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응급피임약 이용 여성 사이에선 응급피임약 의사처방제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주말과 휴일 이용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중 병원이나 약국이 문을 닫아 처방이나 약품 구입이 원활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힌다. 이유선 쉬즈웰산부인과 명동점 원장은 “주말에 진료하는 병원이 많지 않아 월요일이나 휴일 이튿날 오전 (응급피임약) 처방률이 높은 편”이라며 “최근엔 주5일 근무제로 토요일에 병원을 찾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홍보에만 급급, 부작용은 나 몰라라
실패율 높고 임신 땐 기형 출산 우려
응급피임약의 폐해가 비단 허술한 유통체계에만 있다면 얘긴 오히려 쉽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찮다. 가장 큰 문제는 피임에 대한 여성의 지식 부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오해다. 응급피임약 국내시장 점유율 1위(87.5%)를 차지하고 있는 A제약업체는 자사의 응급피임약을 홍보하기 위해 별도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이 사이트를 둘러보면 응급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은 그저 기우일 뿐이다. 간혹 복용(희망)자가 부작용에 관한 질문을 올려도 업체 측은 “생리주기나 임신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으며 5일 내에 체내에서 모두 소실되므로 약물 축적에 의한 부작용도 거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피임약엔 에스트로겐이 함유돼 있다. 에스트로겐은 생식주기에 영향을 끼치는 여성호르몬의 일종. 과다복용할 경우 유방암을 일으키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유방암 가족력이 있거나 과거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은 피임약 복용에 극히 신중해야 한다. 전문의에 따르면 간 기능이 약하거나 편두통을 심하게 앓는 여성에게도 피임약 복용은 좋지 않다. 더욱이 응급피임약은 호르몬 농도가 진해 일반피임약 40~50알을 한꺼번에 먹는 것과 같다. 자칫 생리주기장애나 어지러움, 두통, 메스꺼움, 구토, 하복부 통증, 유방통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일반피임약에 비해 훨씬 높은 응급피임약의 피임실패율(약 15%)도 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는데도 임신이 되면 태아의 기형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이 경우 전문의와 상담을 거쳐 산모가 중절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약국 단속 형식적
‘처방전 없는 조제’ 적발 거의 없어
제약업계에선 통상 여름 휴가철이 낀 3/4분기를 피임약 집중 판매 기간으로 꼽는다. 휴가 끝 무렵인 8월 중·하순에 응급피임약 판매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허술한 판매관리와 제약업계의 활발한 홍보, 피임을 조장하는 듯한 언론보도도 응급피임약 시장의 급성장에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규제 시스템은 헛돌고 있는 실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국정감사에서 “응급피임약 시판이 허용된 2001년 11월 이후 지금까지 심각한 부작용 사례가 보고된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에 큰 문제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식약청 의약품관리과 관계자는 “단순히 특정 의약품의 매매를 이유로 규제 여부를 섣불리 결정하긴 힘들다”며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행 약사법에 따르면 약사가 전문의약품을 처방전 없이 매매했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와 별도로 적발 횟수에 따라 1차 자격정지 15일, 2차 자격정지 1개월, 3차 면허취소 등의 행정처분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 이에 따른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미지수다. 지난해 9월까지 보건복지가족부가 적발한 의약분업 위반 사례는 76건에 불과했다. ‘처방전 없는 전문의약품 판매’에 해당하는 임의조제는 11건뿐이었다. 현행 시스템이 얼마나 ‘솜방망이 규제’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약국이 무책임한 전문의약품 판매로 질책을 받으며 약사들의 자정적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이 같은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주의감시 및 권고 차원의 캠페인을 펼치는 한편, 적법한 절차에 따른 처방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진 이런 시도들이 큰 빛을 못 보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현재 약국 단속 업무는 관할 행정기관인 보건복지가족부가 맡고 있는데 실질적 단속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며 “단속권한 자체를 약사회에 위임해 보다 정확하고 신속한 관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단속·제재 근본 해결책 안돼
성윤리 회복 위한 정부 캠페인 시급”
그러나 일부에선 물리적 단속과 제재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연세대에서 성문화 관련과목을 가르치는 박모(36) 강사는 “응급피임약 보급이 성윤리를 파괴시킨 측면이 있다 해도 응급피임약을 금지시키면 성윤리가 회복될 거란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말했다. 무절제한 성문화의 원인은 피임법이 아니라 성의식 변화란 것이다. 박 강사는 “거의 모든 드라마·영화·소설 등이 성(性)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대중은 이런 문화를 흡수하며 성윤리에 대한 자각이 흐려진다”고 설명했다. 응급피임약의 개발과 사용은 파괴된 성윤리의 결과물에 불과하단 얘기다. 그는 “응급피임약의 무분별한 판매 근절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응급피임약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이 이를 건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응급피임약의 각종 부작용을 막기 위한 근본적 대책으로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여성부는 최근 정부부처 최초로 티저광고(기획의도를 숨긴 채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후 어느 순간 메시지를 노출하는 광고) 방식을 도입, 건전한 성문화 조성 캠페인을 진행했다. 젊은 남성을 등장시켜 사후피임에 관한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전달, 호응을 얻었다.
건국대 강혜선(22)씨는 “일시적 캠페인도 좋지만 캠페인의 취지와 여성의 경험담, 전문의 소견 등 건전한 성관계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담은 사이트가 개설되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성서대 상담교사 김경민(39)씨는 학생들의 성관계 관련 고민을 들어주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만한 해결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응급피임약 오·남용 등 무분별한 성행위로 인한 사회문제를 줄이려면 남성 위주의 왜곡된 성문화를 개혁하는 게 급선무”라며 “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건전한 성문화 형성을 위한 효과적 성교육과 온·오프라인 캠페인을 꾸준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처방전 발행 논란
"필요없다" 안전성 문제, 약사 상담으로도 충분
"필요하다" 피임불감증 부추기고 오·남용 심각
응급피임약을 소화제나 진통제 같은 일반의약품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약사회 기획2팀 관계자는 지난 4월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응급피임약 ‘플랜B’를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최소 연령을 18세에서 17세로 낮춘 것과 관련 “FDA의 결정은 응급피임약의 안전성이 어느 정도 확보됐다는 걸 의미한다”며 “우리도 처방권 없는 응급피임약 판매를 허용해 이를 필요로 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환자 본인의 체질 등을 약사와 상담해 안전성 부분을 보완한다면 일반의약품으로의 전환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약사들은 응급피임약 판매에 관한 현실적 고충을 털어놓는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강남구 M약국 김모(42) 약사는 “고객이 응급피임약을 원하는 이유가 무방비 상태에서 맺은 성관계인지 성범죄 피해인지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느냐”며 “처방전 없는 전문의약품 판매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환자 요구를 뿌리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서울 노원구 D약국 현모(27) 약사는 “환자의 기본체질과 복용 중인 약품 파악 등은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일은 ‘편의성 확보’란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국민건강’의 큰 틀에서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체로 응급피임약을 (처방전이 필요없는)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데 대해 부정적이다. 정호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피임·생리연구회 이사는 “응급피임약은 지금도 무분별한 성관계의 면죄부로 활용되는데 처방전까지 없애면 오·남용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유선 원장은 “응급피임약은 배란 시점에 피임을 못한 경우 생리주기당 한 번만 복용해야 약효가 제대로 발휘되므로 처방전 역시 1회에 국한해 발급하는 게 원칙”이라며 “나중에 필요할 때 먹겠다며 추가처방을 요구한다고 해서 전부 다 들어줄 순 없다”고 말했다.
채규환 식약청 의약품안전정책과 사무관은 “응급피임약의 처방전 폐지는 부작용에 대한 안전성 평가를 비롯해 우리 사회 성문화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처방전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끊을 수 있도록 해달란 요구도 일리가 있지만 처방전을 아예 없애고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성의식 개방으로 충동적·즉흥적 성관계가 난무하는데 응급피임약 구입이 쉬워지면 피임 불감증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응급피임약은 시판이 허용된 2001년 당시에도 격렬한 찬반 논쟁에 휩싸였다. 찬성하는 쪽은 “응급피임약이야말로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종교계와 여성계 등은 “응급피임약은 책임 있는 성관계를 감소시킬 뿐 아니라 ‘조기 낙태약’과 같은 효과를 일으켜 더 많은 낙태를 유발할 수 있다”며 이에 맞섰다. 실제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응급피임약이 언론에 소개된 직후 사용법 등을 문의해온 여성의 90% 이상이 무책임한 성행위 경험자였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모 종교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응급피임약 복용을 통한 피임은 화학적 인공유산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성주의문화운동단체 '이프토피아' 관계자는 "응급피임약이 낙태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예방 차원에서의 성교육과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교육단체 '연분홍치마' 회원 최모(26)양은 "여성은 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 엄청난 신체적 희생과 도덕적 책임을 감내하고 있다"며 "응급피임약 등의 피임법 발전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의술이란 미명 아래 여성을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아영(23) 경주대 총여학생회 정책국장은 "성적 자유는 인정돼야겠지만 성적 방종까지 인정할 순 없다"며 "다른 피임법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사후피임약 복용을 건전하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공혜진 인턴기자 alsere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