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근이 청계동으로 돌아온 지 열흘이나 지났을까, 안악의 이창순이 급한 편지를 보내왔다. 중근이 얼른 뜯어보니 내용이 대강 이러했다.
'자네가 떠난 지 대엿새쯤 되어 내 집에 큰 변고가 있었네. 그날 한밤중에 어떤 놈들이 일여덟이나 작당하여 다짜고짜 집안으로 뛰어들더니 내 아버님을 마구 때리고 잡아가려 든 게 발단일세. 마침 바깥방에서 자고 있던 나는 그 소란을 듣고 화적(火賊)들이라도 쳐들어온 줄 알았네. 급한 김에 단총을 찾아들고 아버님을 끌고 집을 나서는 놈들을 뒤쫓으며 공중으로 몇 방을 쏘았다네. 그러자 그놈들도 나를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며 겁을 주더구먼. 잘못 아버님이 다칠까 걱정되었으나 나도 마주 총을 쏘며 죽고 살기로 덤벼들었다네. 자식 되어 두 눈 뻔히 뜨고 아버님이 화적 떼에게 끌려가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러자 놈들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아버님을 버려두고 도망쳐 버렸네.
그런데 이튿날 사람을 놓아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놈들은 화적 떼가 아니었네. 청국 의사 서가(徐哥) 놈이 삼화항(三和港:진남포)에 있는 청국 영사에게 자네와의 일을 저 좋게만 일러바쳐 얻어낸 순검 패거리였다고 하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청국 영사가 서가의 말만 듣고 청국 순사 둘과 조선 순검 둘을 보내 자네를 잡아오라고 한 것인데, 그것들이 잘못 알고 내 집을 덮쳤다는 것일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 될 듯하네. 청국 영사가 끼어들어 저희 순사뿐만 아니라 조선 순검까지 앞세워 자네를 잡게 하였다니, 서가가 법사(法司)에 선수를 친 셈 아닌가. 얼른 진남포로 가서 자세히 내막을 알아보고 조처해야 할 것이네.'
그런 편지를 읽어본 중근은 그날로 말을 달려 삼화항으로 달려갔다. 가서 가만히 알아보니 대강 이창순이 알려준 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날 이창순이 쏜 총에 순검 하나가 얼굴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것과 삼화항 순검들은 자기들이 끌고 가려 한 이용일과 다른 한 사람을 중근과 이창순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외부대신과 황해도 관찰사 사이에 오간 공문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다.
'청국 영사가 삼화항 감리에게 안중근과 이창순이 청국 의사 서원훈을 때려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만든 일을 공식으로 문제 삼고 나오자, 삼화항 감리는 순검 여럿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이창순을 오인)을 잡아오게 했다. 그런데 안중근과 이용일을 잡아가는 도중 괴한들이 나타나 총을 쏘며 순검들을 두들겨 쫓은 뒤에 두 사람을 구해 달아나 버렸다. 그 과정에서 순검 하나가 괴한들이 쏜 총에 얼굴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그러자 청국 영사는 그 시비를 서울에 있는 공사(公使)에게 보고하여 대한 제국 외부에 알리고, 중근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황해도 관찰부를 통해 그 일을 알아본 외부대신 이하영은 황해도 관찰사 이용필에게 중근과 이창순을 잡아들이게 했다.
이에 체포를 피해 서울로 올라간 중근은 아버지 안태훈 때부터의 연줄을 동원해 외부에 청원을 냈다. 서원훈이 먼저 안태훈을 때린 일을 알리고 전후 사정을 털어놓자 다행히도 외부는 그 재판을 삼화항 재판소에 환부하도록 했다. 그 뒤 중근은 서원훈과 나란히 공판을 받게 되었는데, 끝내는 서가의 만행이 크게 드러나 재판에서 이겼다. 하지만 그 승리는 어쩌면 중근의 유별난 효성이나 지기 싫어하는 상무의 기개를 떨쳐 보인 것이 아니라, 대한 제국의 대외관계에서 그만큼 추락한 청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바람에 중근은 1904년 여름을 이겨야 크게 얻을 것도 없는 그 소송으로 보내었다. 그러다 보니 2월의 러일전쟁 발발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조인부터 8월의 제1차 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죄어오는 나라 안팎의 사건 사태들은 중근의 의식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의 안위를 옥죄어오는 시비에서 벗어나자, 그 모든 일들은 추체험의 형태로 중근의 둔감과 무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