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정서란 무엇일까? 한국 고유의 전통적 정서를 보여준 대표적 작품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들 수 있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나주·광주 지방의 판소리 유파를 가리킨다. '서편제'의 원작자 이청준은 이 작품의 주요 정서가 '한'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비 유봉이 딸 송화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장님을 만든 장면을 두고 개봉 당시 논란이 됐던 것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그런데 과연 '한'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한'이 한국의 고유한 정서라고 할 수 있을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의 소설 '남도사람' 연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남도 사람 연작은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서편제'와 '소리의 빛'이 영화 '서편제'로, 그리고 '선학동 나그네'가 영화 '천년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국민영화로 불렸던 '서편제'는 서로 주변을 맴돌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오누이의 사연을 다루고 있다.

동호라는 이름의 청년이 어느 마을에 흘러들어온다. 그는 주막집 주인 아낙에게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여자는 눈먼 장님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소릿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동호는 주막 아낙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눈먼 장님은 송화라는 여자로 동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누이 관계이다. 어머니가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이후 동호는 아버지에게 은근한 살의를 느끼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호된 소리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동호는 아버지와 송화를 버리고 떠난다. 딸 송화는 아버지의 곁에 남아 떠돌이 소리꾼으로 살아간다.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중요한 사건은 아버지 유봉이 친딸인 송화의 눈을 멀게 했다는 사실이다. 유봉은 잠든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한다. 사람들은 장님이 되면 눈에 뻗칠 정기가 목과 귀로 모여 소리의 길을 터준다고 말한다. 이 소문은 곧 아버지가 송화의 소리를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했다는 짐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문에 대해 동호는 다른 추론을 이야기한다. 송화가 아비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해 송화의 눈을 멀게 했다고 말이다.

어찌 됐든 간에 송화는 아버지로 인해 눈이 멀게 된다. 개봉 당시 사람들은 '소리'라는 예술을 위해 인생의 질을 바꾸고 장애를 만들어 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에 설왕설래했다. 유봉의 행위는 송화에게 '한'을 심어 주려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과연 '한'이라는 것이 이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한이란 쌓이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원작자 이청준은 "'한'이란 먼지처럼 조금씩 쌓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이란 단숨에 풀어버리는 무엇이 아니라 돌고 돌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도록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한'이란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경과도 같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기 때문에 쌓일 수밖에 없는 잔여물이기도 하다.

만일 송화에게 한이 있다면 그것은 눈이 멀었다는 육체적 사실 자체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송화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없고 영원히 떠돌아야 한다는 것, 퇴색해가는 소리꾼의 운명 자체가 한으로 작용한다고 봐야 옳다. 떠도는 삶이기에 한이 맺히지만 또 한편 한을 풀기 위해서는 계속 떠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살아 생전에는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이란 한국의 고유한 정서일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살다 보면 고통스러운 경험 하나쯤은 갖게 된다. 그 고통은 매우 주관적이라서 누군가에게 세상이 무너질 만큼 클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사건이기도 하다. 똑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기억되고 내면화되는 방식은 각각이다. 고유한 한국적 정서로서의 '한'은 아마도 살아가면서 겪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아픔과 상처일 것이다. 그런데 '한'은 고통과는 또 달라서 살아가는 힘으로 되돌려지기도 한다. 한의 고유한 힘은 바로 고통이 힘이 되는 역설에서 비롯된다. 고통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역설, 이 역설 속에 한국의 전통적 정서인 '한'에 대한 실마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더 생각해볼 거리

1.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전통적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2.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로 '한' 이외의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3. '한'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 토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