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미국 극장가를 휩쓴 애니메이션 '업(Up)'의 주인공 꼬마 '러셀'의 모델은 이 영화를 만든 픽사(Pixar) 스튜디오의 한국계 직원 피터 손(32·한국명 손태윤)이었다. 2000년부터 픽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해 온 손씨는 '업'과 함께 개봉하는 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파틀리 클라우디(Partly Cloudy)'로 감독에 데뷔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픽사 스튜디오에서 열린 '업' 시사회에서 손씨를 만났다. 1970년대 뉴욕으로 이민 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한국말을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공손히 말했다. "만화 주인공보다 당신이 더 귀엽게 생겼다"고 하자 그는 크게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픽사 분위기가 놀면서 일하는 식이에요. 회의할 때 서로 얼굴을 그려주곤 하는데, 러셀은 다른 사람들이 그려준 제 얼굴이에요. 이번 영화의 꼬마 주인공을 아시아계로 하기로 했고, 자연스럽게 제가 모델이 됐죠."
개봉 첫 주에만 6800만달러(약 840억원) 입장수입을 올려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업'은 70대 노인과 초등학생 꼬마가 함께 모험을 떠난다는 내용. 지난달 프랑스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7월 말 개봉할 예정이다.
"저를 닮은 캐릭터가 이렇게 큰 영화에 나와서 정말 기쁩니다. 어렸을 때 뉴욕에선 인종차별을 많이 겪었어요. 그때 '인디아나 존스 2'에 베트남계 소년이 주요 배우로 나와서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제 한국 어린이를 닮은 캐릭터가 미국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됐잖아요."
이 영화에는 꼬마가 혼자 좌충우돌하며 텐트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손씨가 회사 잔디밭에서 텐트를 치는 모습을 다른 직원이 비디오로 찍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는 "영화 장면보다는 훨씬 텐트를 잘 친다"며 "어렸을 때 아버지와 낚시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캠핑에 익숙하다"고 웃었다.
미국 애니메이션 명문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를 졸업한 손씨에겐 사실 영화 주인공 모델이 된 것보다 픽사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 더 큰 뉴스다. 그의 단편영화 '파틀리 클라우디'는 구름이 만든 아기들을 황새가 물어다가 집집마다 놓는다는 이야기다. 손씨는 "어렸을 때 본 디즈니 만화영화 '덤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황새가 덤보를 물어다 놓잖아요. 흔히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고도 하고요. '황새가 어디서 아기를 데려오는 걸까' 했던 그때 궁금증을 영화로 만든 거죠."
그가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기 시작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그때 부모님이 식료품점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금요일마다 은행에 들렀다가 저를 극장에 데려가셨어요. 영어가 서툰 어머니는 저에게 계속 '뭐라고 하는 거니?' 하고 물으셨죠. 그런데 디즈니 만화영화를 볼 때는 전혀 문제가 없으시더라고요. 그때 저는 '이다음에 커서 만화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손씨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스토리 작가로, '라따뚜이'에서는 생쥐 에밀의 목소리 배우를 맡기도 했다. 이제 장편영화 감독 데뷔만 남은 셈이다. "단편 영화를 더 많이 만들어야죠. 그리고 아이디어를 계속 내다보면 언젠가 장편을 내놓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