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시집 《농무》에 실린 시 〈파장(罷場)〉을 통해 민중의 초상을 구수한 언어로 그렸던 신경림(74) 시인이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생의 길목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초상을 모아 한 권의 앨범과 같은 에세이집을 냈다. 키가 작아서 늘 맨 앞 자리에 앉았던 시인의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 책의 묘미는 60~70년대 문인들에 얽힌 추억이다.
김관식 시인은 새해 첫날 조지훈 시인에게 세배를 갔다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서정주 시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택시 안에서 김 시인이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택시가 아니라 방으로 들어오는 줄 안고 신을 벗어 놓고 택시에 올랐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이 구속됐을 때 문인들이 모여 항의 시위를 하자고 했다. 소설가 이문구는 "모두 잡혀갈 것이 뻔하다"며 혼자 반대했다. 결국 시위를 하기로 했는데, 다른 작가들은 겁이 나서 일부러 늦게 현장에 나갔다. 하지만 이문구 혼자 제시간에 나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민중시의 새 지평을 연 시집《농무》는 초판 500부만 찍었다. 선배시인들에게 우송하려고 했더니 "시집이 너무 많아 귀찮다"고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