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麗末鮮初)는 혁명적 시기다. 임금만 바뀌어도 피바람이 불기 십상이었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 대변혁이 일어났으니 구한말이나 해방정국 그 이상의 격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쇠퇴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고 구석구석에서 새로운 비전을 갖춘 인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한편으론 무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토지개혁을 밀어붙인 조준(趙浚·1346~1405)이 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고려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나라의 이념을 준비한 집안이 있었다. 무송(茂松) 윤씨 집안이다. 여말선초를 거치며 흥한 집안도 있고 멸족당한 집안도 있었다면 무송 윤씨는 흥한 쪽이다.
윤택(尹澤·1289~1370)은 공민왕에게 송나라 진덕수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경연에서 읽도록 최초로 권한 인물이다. 이때부터 무송 윤씨 집안과 '대학연의'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 고려 임금들이 주로 읽은 정치지침서는 당 태종을 이상적 모델로 간주하는 '정관정요(貞觀政要)'였다. '정관정요'가 패도(覇道)의 정치철학서라면 '대학연의'는 왕도(王道)의 정치철학서였다.
윤택의 아들 윤귀생(尹龜生)은 이렇다 할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손자 윤소종(尹紹宗·1345~1393)은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 혁명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조선 건국에 일익을 담당해 훗날 개국공신이 됐다. 학자풍의 깐깐한 성품을 갖고 있던 윤소종은 말년의 공민왕에게 거침없는 상소를 올려 동료들이 늘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점차 고려 왕실에 대해 좌절감을 느껴가던 윤소종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해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직접 찾아가 곽광전(�j光傳)을 바쳤다. 곽광은 한나라 때의 정치가로 자기 뜻에 따라 황제를 갈아치웠던 인물이다. 우왕을 내치고 다른 왕씨를 임금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암시였다. 실제로 이성계 세력은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게 된다.
공양왕 때에는 실력자 조준의 도움으로 경연강독관이 된다. 당시 공양왕이 '정관정요'를 읽고 싶어 정몽주(鄭夢周·1337~1392)로 하여금 그것을 강의토록 명했다. 그러나 윤소종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전하께서는 중흥(中興)의 임금으로서 요순시대를 본받아야 하며 당 태종은 취할 바가 못됩니다. 바라건대 대학연의 강의를 들어 옛 성군(聖君)의 정치의 길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윤소종의 건의가 간절했던지 공양왕은 '정관정요'를 포기하고 '대학연의'를 읽게 된다. 무송 윤씨 집안과 '대학연의'의 인연은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이어진다. 태조 이성계가 무인출신이면서도 즐겨 읽었던 책이 '대학연의'다. 이방원이 정도전의 견제로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조준이 은밀히 건네준 책도 '대학연의'다. 조준이 한살 많은 윤소종에게 학문을 배웠음을 감안할 때 제왕학으로서 '대학연의'라는 책이 갖는 의미를 조준에게 일깨워준 사람도 윤소종이었을 것이다. 조준은 미래의 국왕을 향한 책 건넴까지 윤소종에게서 배운 셈이다.
'대학연의'를 매개로 한 조선왕실과 무송 윤씨 집안의 인연은 세종 때까지 이어진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 10월17일 첫 번째 경연을 여는데 첫 교재가 '대학연의'였다. 이 자리에 참찬관이라는 직함으로 강독을 돕기 위해 참석한 인물 중 하나가 윤회(尹淮·1380~ 1436)다. 10세 때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외웠다는 윤회는 술 때문에 태종 세종으로부터 야단을 맞으면서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으나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에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오르게 된다. 첫번째 경연이 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8일 저녁 술자리에서 세종은 윤회를 편애하며 별명까지 부르면서 장난을 쳤다. 다른 신하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윤회와 장난을 친 것은 그와 친하기 때문이다. 내가 윤회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그 실상은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상왕(=태종)을 통해 윤회가 사학(史學)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윤소종이 우리 왕가에 자못 공(功)이 있었으니, 경(卿)들은 이를 알 것이다."
윤회의 큰아들 윤경연(尹景淵)은 출세를 하지 못했지만 그 아들 윤자운(尹子雲·1416~1478)은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고 윤자운의 여동생이 바로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부인이다. 소설 등에서 남편이 성삼문의 길을 가지 않자 목매 자살했다고 묘사되는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신숙주 부인의 자살설은 허구다. 다만 집안 분위기로 볼 때 신숙주의 처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여말선초의 격변기를 잘 올라탄 무송 윤씨 집안도 윤자운으로 끝을 맺게 된다. 1478년(성종 9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실록은 이런 비평을 남겼다. "아들이 둘인데 모두 어리석고 미련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보살피지 않음이 많았으므로 그 마을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할머니는 아들이 없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