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갈색 모자·베스트(vest)·부츠를 갖춰 입은 카우보이 차림 남자가 7260㎡의 너른 잔디밭 한쪽에 나와 섰다. 잔디밭을 둘러싼 울타리 주변엔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 100여명이 양치기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14일 오후 1시30분 경기도 과천시 서울동물원의 테마가든 내 '양몰이장'에선 국내 동물원 최초의 양몰이 공연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잔디 위의 카우보이는 영국산 양치기개인 보더콜리(Border Collie) 암컷 그웬(5)과 수컷 에쉬(3)에게 7개월 동안 양몰이 훈련을 시켜온 조련사 장영진(37)씨였다.
서울동물원이 독일 라이프치히동물원을 본떠 작년부터 준비한 첫 공연을 앞두고 장씨 얼굴은 몹시 긴장돼 보였다. 앞으로 평일 오후 1시30분, 주말·공휴일 오후 1시30분과 5시면 어김 없이 선보여야 할 공연의 성패가 달린 순간이었다.
1시34분 장씨가 영어 명령어를 외쳤다. "업!" 양몰이장 저 너머에서 진돗개만한 검은개가 한달음에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눈이 노랗고 발은 하얀 세 살배기 에쉬였다. 양몰이장에 도착한 개는 '업(up)'이란 말대로 풀쩍 뛰어올라, 높이 1m가 넘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관객들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박수가 터져나왔다.
"컴 바이!" 장씨가 '양떼를 시계방향으로 몰라'는 명령어(Come-Bye)를 내리자 에쉬는 순식간에 양몰이장 반대편 양떼 우리로 달려갔다. 시속 50㎞까지 낸다는 보더콜리다운 몸놀림으로 사라졌던 개는 이윽고 26마리 양떼를 앞세워 잔디밭으로 돌아왔다. 슬금슬금 뒤처지려는 양이 보이면 에쉬가 양의 발뒤꿈치를 살짝 물었다 놓으며 앞으로 갈 것을 재촉했다. 견공들 중에서 가장 지능이 좋다는 양치기개 특유의 습성이었다.
에쉬에게 '컴 바이' '어웨이(Away·양떼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몰아 가란 의미)' 같은 명령어가 떨어질 때마다 양떼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쪽저쪽을 헤맸다. 간혹 에쉬가 3~4마리 양을 놓치면 조련사 장씨는 "룩백!"이라 말했다.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찾아오라'는 뜻의 명령어(Look Back)였다. 장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는 말썽꾸러기 양들을 찾아나섰다. 활기차게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에쉬를 보며, 어린이들은 어느새 양치기개의 팬이 됐다. 어쩌다 에쉬에게 반항하며 엉뚱한 데로 가는 양이 있으면 아이들은 입을 모아 응원을 시작했다. "강아지, 이겨라! 강아지, 이겨라!"
1시42분 에쉬가 다시 양떼들을 몰고 가 모두 우리로 밀어 넣었다. 길었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은 8분간의 공연이 끝나자 장씨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겨우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개 에쉬는? 혀를 빼물고 할할거리며 나무울타리를 향해 달려가더니 다리 한쪽을 번쩍 들고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등장할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신나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