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노론과 남인의 당쟁은 되풀이됐다. 물론 다수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고, 소수 남인은 이에 딴죽을 거는 모양새였다. 이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준론(峻論) 탕평'을 추진하게 된다.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시도한다. 더불어 홍국영을 앞세워 정후겸, 홍인한 등 외척 세력을 제거했다. 덕분에 정권 실세로 떠오른 홍국영은 마구 세도를 부렸다. 그러자 당연히 붕당 세력의 비난이 홍국영에게 쏟아진다. 하지만 영리한 정조는 세간의 관심이 홍국영에게 쏠린 틈을 타서 조용하게 '왕권강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정조는 자신의 처소에 아예 '탕탕평평실'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또 '문화정치'를 내세워 규장각을 세우고, 거기에서 과거제도를 주관케 했다. 더불어 당색에 물들지 않은 37세 이하 젊은 문신을 뽑아 규장각에서 직접 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를 운영해 친위세력을 구축한다. 또한 노론의 입김이 스며있는 5군영을 축소하고,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강화해 군권도 장악한다.
정국 운영에 자신감을 갖게 된 정조는 집권 중반기인 1789년, 세손 시절의 스승 김종수를 우의정으로,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든 충신 채제공을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마침내 탕평정치를 선언한다. 그런데 김종수는 소신이 뚜렷한 노론의 거두였고,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다. 붕당의 두 거두를 이용해 붕당을 잠재우려는 승부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종수는 정조의 탕평책을 대놓고 비판했다.
"군자의 당, 소인의 당에 대한 시비를 분명히 가려 올바른 의리를 가진 붕당과 함께 정치를 하시고, 그들이 틀리다 싶으면 다시 물러가게 하면서 일진일퇴 방식으로 조정을 다스리심이 옳습니다…."
힘 있는 붕당에 권력을 몰아주는 붕당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뜻밖의 비판에 정조는 난감했다. 이때 좌의정 채제공이 임금의 편에서 김종수를 반박한다.
"시비를 논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피를 불러온 역사를 또다시 반복한단 말입니까? 당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각 당에서 의리에 밝은 사람을 엄정하게 골라 써야 합니다."
탕평책을 둘러싸고 벌인 노론과 남인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탕평에 반대하는 노론 측은 외척이 참여하지 않는 깨끗한 정치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청명당(淸明黨)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인 측은 이들을 '벽파(僻派)'라고 불렀다. '한쪽으로 치우친 간사한 무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노론 측은 남인 세력을 '시파(時派)'라 불렀다. 시류에 편승해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둘 다 서로를 비꼬는 이름이었다.
정조의 강력한 탕평책에도 붕당 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가라앉지 않았다. 채제공 혼자서 재상 직을 지키던 1790년에는 노론 세력의 사주를 받은 시전 상인들이 매점매석을 해서 도성의 생필품이 동나게 했다. 그러자 채제공은 시전 상인들의 특권인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폐지해버린다. 이에 노론 측은 남인과 천주교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이가환과 정약용 등을 숙청함으로써 남인 쪽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처럼 당쟁이 불거질 때마다 정조는 적절히 개입하면서 각 붕당 세력의 균형을 맞췄다. 군자의 당에도 소인이 있고, 소인의 당에도 군자가 있을 수 있으므로 각 붕당에서 인재를 고루 쓰자는 것이 정조가 내세운 탕평의 취지였다. 붕당의 대립을 적절히 조정해 첨예한 당쟁을 예방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의 속마음은, 당쟁 과정에서 각 붕당의 힘이 동시에 소모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교 사회에서는 흔히 백성을 물에, 군주는 그 위에 떠 있는 배에, 그리고 신하는 배를 젓는 사공에 빗대어 말한다. 하지만 정조는 말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글에서 '백성은 수많은 물이며 군주는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밝은 달'이라고 했다. 신하의 존재와 붕당을 부정하는 정치철학이자 새로운 '군주론'이다. 정조가 추구한 탕평책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괴질로 세상을 뜨면서 조선의 새로운 정치실험은 멈추고 말았다. 게다가 정조 사후 60년간은 탕평도 붕당도 모두 세도정치의 그늘에 묻혀버렸다. 붕당과 탕평이 아니라, 족벌과 파벌이 진짜 문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