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중년 여배우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원조 얼짱' 이니 '원조 국민 여동생'이니 하면서 화제가 되곤 한다. 젊고 섹시한 그녀들의 과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엄마의 처녀적 사진을 볼 때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엄마'가 아닌 그녀들의 모습이 낯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로 2•30대 캐릭터들이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을 맡는 상황에서 40대를 넘어선 여배우들에게 주어지는 배역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다. 조금씩 정도와 상황의 차이가 있을뿐, 대부분 주인공의 모성애 넘치는 강한 엄마, 혹은 주인공에게 포악하게 구는 상식 밖의 시어머니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영화 '박쥐'를 통해 '융드옥정 닮은꼴'로 화제가 되고 있는 김해숙의 최근 몇 년간의 행보는 '중년 여배우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모 포털 사이트에서 김해숙의 필모그래피를 검색해보면, 그녀가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2000년 초반부터 맡아 온 역할들이 대부분 '○○의 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영화 '우리 형'에서는 그냥 '어머니'다. 이름도 없이 누구누구의 엄마로만 불려지는 스크린 속 중년 배우들, 그리고 우리네 엄마들의 서글픈 단면이다.
그런 그녀가 달라진 것은 2008년. 영화 '무방비 도시'에서 소매치기 전과 17범 강만옥을 연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발소에서 대충 자른듯한 짧은 머리의 전설적인 소매치기로 변신한 김해숙은 이 작품을 통해 날카로운 눈빛 연기와 청년 연기자들 못지 않은 액션까지 선보였다. 스스로도 "나의 연기 인생에 있어 특별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했을만한 도전이었고, 그 결과 그녀는 그 해 대종상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어 같은 해 4월 개봉한 영화 '경축! 우리 사랑'에서는 21살 연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50대 아줌마 '봉순씨'로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2009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김해숙은 50대에 찾아온 사랑을 통해 엄마에서 여자로 변화해가는 주인공 봉순씨의 설레임과 떨림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2009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는 무능력한 아들(신하균)에 집착하는 '라 여사'로 분해 그로테스크한 눈빛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불과 2년에서 3년에 걸친 시간동안 그녀는 이렇듯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매번 다른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서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최근 해온 역할들도 엄밀히 말하면 '○○의 모'라는 연장선상에 있다. '무방비 도시'에서의 강만옥은 아들과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매치기를 하게 되는 모성애 강한 엄마다. '경축! 우리 사랑'의 봉순씨도 청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래방 운영과 하숙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엄마였다. '박쥐'의 라 여사는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은 기괴한 엄마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해숙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들을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들이 누군가의 '엄마'인 동시에 각자의 이름을 가진 하나의 주체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의 한구절처럼, 김해숙이 연기한 엄마들은 작품 속에서 하나의 꽃으로 피어 있다.
"배우는 나이에 상관 없이 끊임 없이 도전해야 한다" "앞으로도 나이에 상관 없이 해보지 않은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다" 고 말하는 그녀. 이름 없는 들꽃 같은 엄마들에게 저마다의 이름을 붙여주기 위한 배우 김해숙의 '특명! 엄마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