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지휘자와 독주자, 성악가와 달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름 없이 악단의 이름으로만 불린다. 하지만 묵묵히 땀 흘리는 이들의 실력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기초 체력이기도 하다. 국내 교향악단의 '명인(名人)'을 찾아서 제 이름을 붙여준다.
서울시향의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31)씨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대(代)를 이은 음악인이다. 지난 2001년 타계한 그의 부친 채일희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1985~1991년 서울시향에서 클라리넷 수석을 지냈다. 덕분에 아들 채재일씨가 어릴 적부터 갖고 놀던 장난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는 악기도 언제나 클라리넷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어깨 너머로 조금씩 소리를 내보기 시작했어요. 3년쯤 지나자 아버지께서 정식으로 '연주해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클라리넷에 입문한 거죠."
채씨에게 아버지는 엄격하고 무서운 스승이었다. "엄청 떨렸죠. 악기를 들고 서 있거나, 벌도 많이 받았죠. 앞에서는 한번도 칭찬하지 않으셨기에 저 스스로는 클라리넷을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제 자랑을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도 '설마'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꼬마 클라리네티스트 채재일에게 아버지는 우상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연주회는 다 따라다녔죠. 무대에 나오시면 관객들이 숨죽이고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 없었어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아버지의 클라리넷 소리는 곧장 집어낼 수 있었어요."
채씨는 199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환교수로 간 아버지를 따라서 도미(渡美), 줄리아드 음대와 대학원을 마쳤다. 2003년부터 밀워키 심포니에서 단원으로 활동했고,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의 클라리넷 수석으로도 합격했다. 하지만 2005년 지휘자 정명훈이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서울시향에서 단원 오디션이 열린다는 소식에 주저 않고 한국행(行)을 택했다. 그는 "아버지의 자리이기에 어느 수준 이상은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자부심이 있었다"고 했다.
채씨는 금호아트홀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같은 실내악단에서도 활동하고, 2007년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 특별상과 지난해 스페인 도스 에르마나스 1위 입상 등 독주자로도 활약하는 욕심 많은 음악인이다. 그는 "나이가 더 들면 할 수 없는 것들에 도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나 자신을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애로 사항도 적지 않다. 말러 교향곡 1번에서 4번째 클라리넷 주자는 서로 다른 4가지 종류의 클라리넷을 모두 불어야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에서는 8명의 클라리넷 주자가 8가지 종류의 클라리넷을 바꿔가며 연주한다. 그만큼 연주회마다 들고 다녀야 하는 악기와 장비도 늘어난다. 그는 "악기를 많이 사야 하고, 꺼내고 짐 싸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목관 악기 가운데 가장 늦게 퇴장하는 연주자가 클라리넷"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채씨가 말하는 클라리넷의 매력은 어떤 악기와도 잘 섞일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다채로운 음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과 밝음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에서도 중간 음역을 담당하면서 독주(獨奏)와 반주까지 모두 소화하죠." "흔히 비올라나 첼로가 목소리와 닮았다고들 하지만, 클라리넷이야말로 우리의 음성과 닮아 있는 관악기"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클라리넷 명가(名家)의 자부심이 그대로 묻어났다.
▶채재일 클라리넷 리사이틀, 6월 17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