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이여, 할 말이 있으니 꼭 내 말을 들어주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것을 가족에게 나눠주지 않는다거나 또 혼자만의 용한 재주를 간직하고서 이웃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과연 그게 동포의 정리라 할 수 있겠소? 지금 내게 별미가 있고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그 음식은 한번 먹기만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것이요, 또 그 재주는 한번 통하기만 하면 하늘로 날아갈 수 있소. 이제 그걸 가르쳐 드리려 하니 여러 동포들은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오……."

그렇게 시작된 중근의 설교는 주로 정하상(丁夏祥)의 상재상서(上宰相書)와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서 펼치는 교리에 따르고 있었다. 삼혼설(三魂說)에 기초한 영혼론, 대군대부설(大君大父說)에 따른 충효론에 이어 천주의 존재증명과 천당지옥론이 펼쳐지는데, 한결같이 정약종 정하상 부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만일 사람이 천주님의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있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마치 유복자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소. 또 소경이 하늘의 해를 못 보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음을 안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화려한 집을 보고서도 그 집을 짓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집을 지은 목수가 있다는 것을 안 믿는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소? 이제 저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의 넓고 큰 것과 날고 닫는 동물과 뿌리 박혀 땅을 덮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처럼 기기묘묘한 만물이 어찌 지은 이 없이 절로 생성될 수 있을 것이오?"

일러스트 김지혁 <a style="cursor:pointer;" onclick="window.open('http://books.chosun.com/novel/lmy/popup.html','se','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no,menubar=no,scrollbars=no,resizable=no,copyhistory=no,width=1100,height=710,top=0');"><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tn_view.gif" border="0" align="absmiddle"><

그러다가 어떤 때는 아주 젊어서부터 그 싹을 보이는 중근의 허무주의적 세계 해석도 곁들여져 있다.

"아, 사람의 목숨은 많이 가야 백년도 넘지 못하는 것이오. 또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그 귀하고 천하고를 물을 것 없이 누구나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알몸으로 저세상에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외다. 세상일이란 게 이같이 헛된 것인데, 이미 그런 줄 알면서도 왜 허욕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악한 짓을 하고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오……."

비록 복사 안다묵으로 따라나선 전교(傳敎) 길이었지만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 남짓이었음을 돌이켜보면 왠지 애처로운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은 야소(예수) 기독(그리스도)의 생애를 조리 있게 정리하고, 가톨릭과 교황청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뒷날의 기록이라 가감된 부분이 있을 테지만, 일찍부터 확립된 중근의 신앙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중근이 빌렘 신부의 복사로서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교에 열중한 동안도 세상은 숨 가쁜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중에도 그 무렵 조선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는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는데, 창립 2주년이 지난 그때는 대한제국의 황제조차도 함부로 억누를 수 없을 만큼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 해 시월에는 독립협회의 항의로 법부대신 신기선이 해임되었고, 뒤이어 그 요구에 따라 내각이 개편되었으며, 다시 황실의 주요 재원(財源)인 무명잡세(無名雜稅)를 폐지함과 아울러 내정개혁까지 약속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1898년 여름이 지나면서 독립협회의 지방 지회(支會)들이 여기저기서 설립되었다. 먼저 충청도 공주와 평안도 평양에서 지회가 생기고, 이어 대구 강계 북청 목포 같은 곳에서도 지회가 결성되었다. 황해도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봉산 재령이 지회를 신청하고 해주 황주에서도 지회 설립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의 압력으로 결국 독립협회의 황해도 지회는 설립되지 못했다. 안태훈은 지역 관원들과 토호 세력들을 근왕(勤王)의 대의로 들쑤셔 독립협회 지회가 설치되는 것을 방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병(私兵)처럼 부릴 수 있는 청계동 인근의 천주교도들과 포군들을 보내 무력으로 위협하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태훈이 무력을 동원할 때면 중근은 잠시 복사 안다묵에 벗어나 아버지의 충실한 손발이자 선봉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