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장사익(60)이 3일 밤 12시40분 ‘MBC 인터뷰 人’(진행 박광온 논설위원) 첫 회에 출연한다. 4월30일 녹화에서 장사익은 자신의 음악과 인생관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장르를 결정하기 어렵다. 독특하다?
▲실은 제 노래 정체성이 없다. 장르가 없어요. 자연스럽게…. 이렇다 저렇다 해서 상관없잖아요. 근데 사람들은 맞춰놓고 살려고 한다. 틀에 갇혀서. 예를 들어 동백아가씨, 찔레꽃 박자 안 맞추고 오히려 쫙 늘여서 부른다. 근데 노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래도 오케스트라랑 할 수 있고. 천천히 늘여서 부르면 사람들이 박수 치려고 해도 부끄럽고 그렇잖아. 그런데 그 속에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들어있다. 예를 들어 '헤~~일 수 없이' 헤 자 하나에 다 들어가 있다.
-득음의 경지? ▲무대뽀죠 허허. 저는 많은 선생님 뵈었다. 저희 집 밑에 김대환 선생, 그 선생님 연구실에 갔더니 산토끼 부르라고 해서 불렀다. 박자를 버리라고 해서 ‘산~토끼’ 불렀더니 너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잖아 그것까지 버려봐. 그때 무릎을 탁 쳤다. 틀 속에서 살았는데 그걸 벗어버리자. 그때부터 제 노래 박이 없다. 찔레꽃은 박이 없다. 제가 호흡하는 대로. 하얀 꽃 찔레꽃….
-억양이 있으신데 고향이 충남 광천?
▲늘 객지, 서울 생활하면서 힘들 때 고향에 가서 갯것 냄새, 갯것전에 가서 비릿한 냄새 맡는 것이 산소 마시는 듯 힘이 된다. 아버지는 특별한 분이라, 고향하면 생각난다. 아버지는 늘 갈 때마다 제가 출세도 못하고 비실비실했거든요. 근데도 제가 간다면 광천역에 자전거 대놓고 기다리고 계셔요. 2시간 동안.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갔더니 아버지도 안 계시고 자전거도 없고. 아, 부모님이 계셔야 고향이구나. 제 노래 대부분이 어렸을 때 고향의 정서가 다 스며들었다. 예를 들어 삼식이란 노래. 동네에서 개구쟁이처럼 놀다 보면 저녁에 엄마들이 이름을 부른다. 제일 만만한 게 삼식이. 삼식아. 밥 먹어라. 공부도 않고 만날 논다고 저 손 보게 새까맣게 까마귀. 살면서 엄마 아버지 기침, 한숨 쉬는 소리. 찔레꽃도 그렇고 이 모든 게 고향 정서.
-노래 시작한 것이 마흔 여섯 우리 나이로? 쉽지 않았을 텐데?
▲충청도 말로 전 자발이 없어요. 차분하지 않고 가볍다는 의미.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닌 게 열댓번 넘어요. 창피하고 그런데 노래는 15년. 아, 이건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구나 행복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
-어렸을 때부터 (노래의 길로) 들어섰더라면?
▲고향에 가면 엄마 친구들이 저 놈 진작 젊었을 때 노래했으면 형편 좀 폈을 텐데 하신다. 그런데 어느 분이 칭찬한 가장 좋은 이야기. 노래는 나이 든 너 만큼 그때 부르는 게 진짜 노래야. 그게 제일 좋은 칭찬. 노래는 나이 들어 부르는 게 진정한 노래 아닌가.
-아,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직장을 전전하다가 아주 힘이 들어서. 마지막 직장이 카센터. 매제가 하는 데서 카 파킹 해주는 일, 차 넣었다 뺐다 하는 거 3년 하다보니 이건 아닌데, 이걸 하려고 세상에 나온게 아닌데. 진짜 내가 하고싶은 걸 해보자. 그러니까 직장생활 전전하다가 돈 벌려고 하다가 돈이 안됐던 거. 진짜 해보고 싶은 걸 한 3년 간 해보자 해서 태평소, 농악 거기에 목숨을 걸었지. 이것만 하면 밥은 먹고 살겠지 해서 열심히 했죠.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뒤풀이에서 노래를 했어. 그동안 목청도 좋고 노래를 배우고 해서 최고 잘 불렀다. 뒤풀이에서. 친구들 등에 떠밀려 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
-첫 음반 취입 때 하루 만에 모두 녹음?
▲누가 공짜로 취입시켜준다고 해서 가서 한 거지. 그냥 놀던대로 가자, 나 갈 테니까 쫓아와라 해서 하루 만에 다해버렸다. 서너 시간에. 지금도 녹음하면 하루에 다 해버린다. 라이브로 그냥.
-찔레꽃 (노래) 가슴을 친다. 우는 분들이 많다?
▲뒤에는 제가 막 울죠. 아, 그 노래를 만들었을 때 밑바닥까지 갔어요.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을 정도로 갔었는데, 찔레꽃을 보고 장미에 가려진 저게 내 모습인데 장미엔 없는 향기가 나더라. 변두리에서 폼을 잡지 못하고 쭈볏쭈볏 사는 소시민들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제 모습도 오버랩되고. 그 뒤엔 제가 울어제끼죠. 한바탕 울고 나면 비온 뒤 세상이 맑아지듯 몸이 정화가 되고. 어느 공연이든 살아있는 한은 제가 힘들지만 그 노래를 부르려고 마음 먹고 있다.
-힘 있게 부르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굉장히 창법이 독특한데?
▲물론 서양의 발성법은 벨칸토라고 해서 가슴부터 머리까지. 국악은 배에서 힘차게 나오는데 전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다. 실은 노래하다 보면 발에서 쥐가 나기도 손이 저리기도 빈혈이 생기기도. 아마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제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허허.
-첫무대에서 반응이 폭발적?
▲세상이 바뀌었지요 하늘과 땅이. 그 이튿날 아침에 행복하구나. 행복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더라. 함부로 행복해 행복해 못하지 않느냐. 그 행복이란 단어가 죽을 때까지 갈 것 같지 않나. 제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공연 전날 사진을 보니까 웃는 사진이 없더라. 지금 보면 맨날 웃는 사진.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일이 많겠지만 웃으니까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하하.
-지난달 뉴욕 하와이 공연. 동포들은 한이 밀려와서 눈물을 흘렸다죠?
▲그게 그냥 와 닿지. 사인도 안 받고 슬쩍 치면서 하는 말씀이 “내가 70 나이가 됐는데 여기 온지 40년 됐어. 장 선생 노래 듣고 오늘 처음으로 가슴이 뻥 뚫렸어” 하고 사인도 안 받고 그냥 가시더라. 그게 모든 걸 대변해주는 거 아닌가.
-외국인들 정서에도 통하는지?
▲예를 들어 내가 슬픈 노래를 하면 뭔가 슬프다. 기쁜 노래면 기쁘다는 것을 70~80% 공유. 제가 빨갛게 노래하면 뭔가 불그스레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다. 마치 외국 팝송이나 뮤지션 왔을 때 가사를 압니까, 그래도 다 수용하듯 노래는 마음이고 그런거라서.
-‘꽃구경’ 전국 다 돌고 미국 공연하셨는데 ‘꽃구경’의 감회?
▲봄이 되어 꽃이 만발하게 폈는데 또 진다. 부모님들이 우리는 해주는 것 없는데 다 주시고 가거든요. 우린 잘 몰라요. 아주 역설적이지만 꽃구경은 죽음의 노래.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혀 꽃구경. ‘세상이 온통 꽃피는 봄날 엄마는 좋아라 하고 아들 등에 업혔네’ 이러면서 어머니는 좋아서 꽃구경 가는데 엄마가 솔잎을 뿌린다. 왜 그러냐니까 니가 내려갈 때 길을 잊어버릴까 걱정이구나. 어머니는 알죠. 자식이 자기를 버리려 가는지 알지만 자식의 걱정을 하거든. 마치 자연과 어머님이 똑같지 않은가. 그게 사람살이 근본 아닌가.
-팬층?
▲제법 있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열성팬?
▲7,8년 전 일본 대학교수가 죽기 전에 콘서트 보고 싶다고 해서 나고야에 간 적. 암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데 공연 전날 갔는데 그 친구가 일어나질 못했다. 내가 당신 위해 공연 하러 왔는데 서운하다 했더니 죄송합니다 그러더라. 이튿날 공연하는데 지팡이 짚고 왔더라. 리허설 다 끝나고 와서 이 친구를 위해 한 시간 공연을 했다. 하나 앞에 놓고. 갈 때 10시에 온 친구들이 그 친구를 위해 길을 쫙 벌려줬다. 그 이튿날 그 친구가 죽었어요. 이듬해 그 와이프가 유골을 갖고 왔더라. 인사동에서 차 마시는데 “당신 좋아하는 장사익 선생님이다.”
-시에 노래를 엮으시는데?
▲제 고향이 서해안인데 늘 하늘만 보면 빨간 하늘만. 저녁 노을이 아름다워서. 모든 분들은 하늘을 파랗게 노래. 근데 어느 시인이 빨갛게 노래한거야. 그러니까 내 이야기. 모든 시를 보면 제 이야기 같은 시가 있다. 그걸 수십 번 되뇌어서 엮어 노래를 만들죠. 그래서 90%를 시 찾는 작업이 노래.
-인정하는 대중가수?
▲가수 배호씨를 어렸을 때 참 좋아했다. 목청이 좋은 것도 아니고 노래가 썩 그런 것도 아닌데 힘이 쫙 빠진 상태에서 노래를 하는데 정말 구성지고. 29살에 요절했는데 제가 그 곱보다 한 두 해 더 살았는데 그분이 부른 삼각지라든가, 노래를 쫓아갈 수가 없어. 발뒤꿈치도.
-창법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
▲없죠. 노래, 가수라는 직업을 화려하게 생각하고 있거든. 유희라고만 생각. 얼굴도 이쁘고 춤도 잘 추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노래는 그게 아니라 속 깊은 곳에서 던졌을 때 사람들이 무릎을 치면서 맞아 내 이야기야, 뭔가 땅하고 치듯 정신 번쩍. 그런 노래들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예순 나이에 달라진 게 있다면?
▲늘 똑같지. 제가 생각할 때도 노래하는 장사익은 머리에 뭔가 들어있고 멋있게 보이거든요. 그러나 일반 장사익은 아무것도 아니거든. 평생 노래하는 장사익을 닮아가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노래의 참맛을 느낀 건 언제?
▲초반엔 잘 몰랐다. 2000년 넘어와서 노래하면서 한 번은 동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환상을 겪은 적이 있다. 노래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환상적 동굴 속으로 들어간 적. 튀어나왔더니 개운해지고. 그래서 요즘은 노래를 즐겨요.
-앞으로 어떤 곡을 담을 것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코드 LP판. 제 삶의 기록이거든요. 욕심이 많아서 이왕 늦게 시작한 거 70,80까지 하고 싶어요. 지금도 주름 많고 힘도 없는데. 지팡이 들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무대에 올라와 무슨 노래를 할 것인가, 그런 꿈을 꾸고 있다.
-소리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은 희망의 메시지?
▲어릿광대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서양에선 임금님에게 막 욕도 하고 농담도 하고 신하가 하면 칼로 베지만 아마 어릿광대는 그런 수단 장치를 둬서 통치를 한 게 아닌가. 어릿광대를 통해 세상물정을 듣는 거 아닌가. (나도) 세상에 사는 어릿광대처럼 그런 팔자로 태어난 거 아닌가.
-힘든 세상인데 힘을 주는 노래 한 곡?
▲다들 힘든데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다 당하는 위기니까 슬기롭게. 봄이 왔으니까 ‘봄날은 간다’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의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