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관해선 이의를 달지 않게 해주는 송강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독한 감기 몸살에 시달렸다는 김옥빈은 뱀파이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나 주위 사람을 걱정시켰다.
둘의 얘기가 시작된 지 몇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인간의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박찬욱 감독의 치정 멜로극 '박쥐'(30일 개봉)의 두 주인공을 26일 만났다. 끝을 날려버리는 경쾌한 발음으로 영화 속 가미된 블랙 코미디에 불을 붙여준 송강호는 예상과는 달리 또박또박한 말투로 카페 안을 채웠고, 매력적인 '팜므 파탈' 역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소화한 김옥빈은 카리스마 넘치는 중저음으로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 '국어책 연기'라는 지적을 받았던 김옥빈의 과거가 한순간에 잊혀졌다.
―뱀파이어가 된 사제가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내용이죠. 송강호씨는 10년 전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요. 그래서 이 작품을 박 감독의 '10년 숙원작'이라고 하는데요.
송: "10년 전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장에서 박 감독님한테 '복수는 나의 것'과 '박쥐'에 대한 시놉시스를 들었는데, 그땐 정말 아무 대꾸도 못했어요. 그 시대에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고 당황했죠.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여러 활동을 하면서 '박쥐'라는 작품에 배우와 관객들이 다가올 수 있게끔 만들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적 토양이 바뀌게 해준 거죠. '복수는 나의 것'이 '파격'이라면, '박쥐'는 '파격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김: "'다세포소녀'(2006) 때 만난 정정훈 촬영감독님 덕분에 이 시나리오를 알게 됐어요. 박쥐의 주인공 태주 역을 절대 뺏기고 싶지 않았어요. '박찬욱 감독님이 연출하게 되면 정말 기절하겠구나'하고 생각했어요."
―도덕적 딜레마나 죄의식, 구원을 어떻게 풀어내려 했나요.
송: "김옥빈씨나 저도 특정 종교는 없지만, 신앙에 대한 경외감은 있었어요. 사실 '밀양'(2007)이라는 영화도 '구원'이라는 세계에 물음표를 던진 거잖아요. 구원의 실체와 신의 존재에 관한 의문을 풀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박 감독님 색채가 워낙 강해서 배우로서 열린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김: "비윤리적인 일과 죄의식을 한번 더 비틀어 보여주니까 좋던데요. 태주는 '난 부끄럼 타는 여자 아니에요'라고 하잖아요. 초반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강조하고, 죄를 짓고 난 뒤에도 난 할 말 있다며 '부끄럽지 않다'고 우겨요.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 담겨 있다 할까…."
―상현과 태주의 관계에서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김: "지긋지긋하지만 뗄 수 없는 사이? 상현에게 '넌 병균이야'하고 외치잖아요. 상현이 나타나면서 알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뜨고, 기존의 지옥을 벗어나게 되면서 또 지옥을 맛보게 되고. 사랑과 증오는 같이 따라다니는 거라 하잖아요."
송: "박 감독과 농담 삼아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인생이 망가지는 역할'이라고 말했죠. 태주와의 사랑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불륜이니까, 극적 구성이 가장 자극적이면서 입체감을 주게 되죠."
―김옥빈씨는 벽에 얼굴을 박아 코뼈가 부러지는 장면도 나오죠. 힘들었던 장면은요.
송: "강우(신하균)를 죽이려고 한밤중 저수지에 들어가는 장면이 영화 속엔 굉장히 짧게 나오지만, 사실 4~5일 동안 밤새우며 찍은 거예요. 또 리코더 연주도 힘들었어요. 21년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감독에게 퇴짜 맞은 순간이었어요.
정말 '올 스톱'. 흉내만 내면 되겠지 했는데, 제가 너무 안이했죠. 한달 반 정도 계속 연습했어요.(그가 연주한 '바흐의 칸타타 No.82―나는 만족하나이다'는 구원으로 죽음마저도 영원한 안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성서 구절이 모티브다. 박 감독이 직접 선곡했다.)"
김: "온 스태프들이 리코더 환청에 시달릴 정도였다니까요. 저는…. 입엔 피를 머금고 건물 6층 높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그 밑으로 아스팔트 바닥이 보이는 거예요. 그 순간 '내가 미쳤구나!' 했죠. 그 공포란…. 'OK' 사인 떨어지자마자 펑펑 울었어요."
―송강호씨는 '괴물'(2006) 이후 4년 연속 칸 레드 카펫을 밟게 됐어요. 야구로치면 선구안(選球眼)이 좋다는 얘기도 나와요.
송: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간 것 자체가 상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김: "너무 기뻐 펄쩍 날뛸 것 같아요. 가서요? 술 마셔야죠. 근데 와인보단 복분자주가 좋아요. 별명이 복빈이, 밥빈이(밥 많이 먹는다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