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재(金明載·33)는 인터넷에서 네티즌에 의해 '인간쓰레기'로 불렸던 인물이다. 싸이월드에 오른 비방 글이 그 글을 열심히 퍼트린 네티즌, 일부 언론의 허위 보도, 자극적 글을 방치한 포털에 업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 사이 사실무근(事實無根)은 기정사실(旣定事實)로 둔갑했다.

가족 외에 그의 편은 없었다. 변호사와 경찰도 꽁무니를 뺐다. 네티즌의 표적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매장됐을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근거 없는 '악플'을 단 네티즌과 허위 보도한 언론을 고발했다. 악플의 재생산을 방조하며 돈을 번 거대 포털과 소송을 벌였다.

대법원은 지난 16일 '인터넷 게시공간에서 돈을 버는 포털 사이트는 피해자의 신고가 없어도 악성 게시 글을 삭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포털에 대해 뉴스를 취재·편집하고 배포하는 언론사에 준(準)한 책임을 지운 것이다. 김명재씨가 4년을 외롭게 싸워 얻은 결과였다.

그는 이겼다. 대신 황금 같은 4년의 젊음을 잃었다. 소송하느라 재산 손실도 봤다. 직장을 잃고 네 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다. 그는 왜 이렇게 세상과 등지게 됐을까. 무슨 이유로 인터넷에서 매장당했을까. 사연은 그가 한 여성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김명재씨는 '지옥'같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4년 뒤 자신을 악마로 몬 상대방들을 이긴 그는 감정이 하나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질문에 답했다. 냉정한 법률가를 보는 것 같았다. 변화에 적응하는 인간의 힘이 징그러울 만큼 질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단(發端)

김씨가 동갑 여성 A씨와 교제를 시작한 건 2004년 4월이다. 두 사람은 친구 소개로 만났다. A씨는 지방대를 나왔다. 김씨는 선린인터넷고를 나와 출판사 회계로 근무하고 있었다. 2005년 3월 둘은 헤어졌다. 직장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데이트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생긴 언쟁이 커진 것이다.

이별은 쉽지 않았다. A씨 가족까지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A씨가 자살했다. 그녀는 장문(長文)의 유서를 남겼다. 경찰이 발견한 A씨의 유서는 10장 분량으로 2005년 4월 16일에 작성됐다. 유서에는 김씨와의 교제과정뿐 아니라 그가 다니던 학교, 회사와 가족 정보가 있었다.

김씨와 A씨 가족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김씨는 이 일을 더이상 숨길 수 없어 회사에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서울에서 경기도 안산 사업장으로 전근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5월 3일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를 비난하는 괴(怪)문서가 회사로 날아든 것이다.

괴문서의 내용은 "김씨가 1년간, 사망한 여성과 교제하면서 성적(性的)으로 유린하고 폭행했으며 2차례 임신을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괴문서와 비슷한 내용이 숨진 A씨의 미니 홈피에도 올랐다. 김씨에게 물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벌어진 상황을 살펴보면 당신은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버려, 끝내 그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으로 되어있습니다. A씨는 2차례 임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입니까?

"처음에는 수정란 상태에서 자연유산을 했다고 들었고 두 번째 임신은 사실이 아닙니다."

―첫 번째 수정란 상태에서 자연유산했을 때 '정액덩어리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정액덩어리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습니다. 위로를 했을 뿐입니다."

―2번째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나요?

"저를 '여성을 임신시키고 버린 사람'처럼 보도한 언론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건강보험공단의 망인(亡人)의 진료기록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제가 승소했고 해당 언론은 정정보도를 했으며 500만원을 배상했습니다."

―왜 A씨가 자살했다고 보나요?

"당시 그는 제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헤어지자고 하니 의지할 데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날 겁니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A씨와 헤어지면서 '여자를 임신시켜놓고 버린 파렴치한'처럼 호도됐고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A씨에 대해 지금 감정은 어떤가요.

"안 좋은 감정은 지금도 없습니다. 원망하거나 '내가 그를 왜 만났을까'하는 후회도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A씨의 자살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사를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파국(破局)

김씨는 2005년 5월 7일부터의 행적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악몽(惡夢)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토요일이었던 그날 오후 외부에 있던 그에게 익명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싸이월드에 그의 신상정보가 뜬 지 정확히 53분 만에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악성 문자 메시지도 줄을 이었다. 전화 내용과 문자 메시지는 한결같이 그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으면 또 전화가 왔다. 문자 메시지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내용을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결국 전화기의 전원(電源)을 끌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전화번호를 바꿔야 했다.

5월 8일 마침내 김씨의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됐다. 숨진 A씨와 함께 찍은 사진도 다수 게재됐다. 곧이어 김씨가 다니던 회사 정보, 이메일 주소가 공개되더니 형제들의 실명(實名)도 공개됐다.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A씨와 찍은 사진은 어떻게 공개된 겁니까?

"저와 사귀면서 촬영한 사진을 그녀가 CD롬에 보관해놓고 있었어요. 그걸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겁니다."

―순식간에 '유명 인물'이 되면서 회사생활에도 지장을 받았겠지요.

"회사에 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유선(有線)전화를 통해 회사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회사에도 협박전화가 왔습니까?

"동료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1분에 여덟 통화 정도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거의 모두 욕설이었고 그런 나쁜 놈은 회사에서 자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안 그러면 불매운동을 하겠다는 협박도 있었습니다."

―무슨 조치를 취했습니까?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4명을 찾아갔는데 전부 사건을 맡는 걸 기피했습니다. 안타깝지만 도와줄 수 없다, 자기들도 피해를 볼 수 있다면서…."

―경찰에 가볼 생각은 안 했습니까?

"A씨 사건을 조사했던 경찰서를 찾아갔지요. 경찰에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당시 저는 이제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적으로 공황(恐慌)상태에 빠졌습니다. 인터넷에 제가 등장한 뒤부터는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습니다. 아무 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달이 흘렀습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었습니까, 혹시 술로?

"저는 술을 마시면 더 괴로워지는 성격입니다. 잘 마시지도 못하고요."

―회사도 그만두게 됐지요.

"5월 9일 오후 4~5시 사이에 회사에 들어갔어요. 회사측에서 '어떻게 하겠느냐' '김명재씨는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냐'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그 회사에서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만 5년을 일했습니다. 그랬던 회사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사직서에 사인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습니다."

―사직서를 쓰고 끝난 겁니까?

"회사 인사팀장은 A씨 싸이월드 미니 홈피에 '김명재 본인이 회사를 퇴직했다는 글을 게시해 이제 회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네티즌에게 알릴 테니 허락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럴 경우 허위 글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어서 거부했습니다."

―회사를 나와 무엇을 했습니까?

"제가 살던 화곡동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잠시 피신하다 형이 얻어준 월계동 아파트로 갔지요."

―학교도 못 다니게 됐지요.

"입학한 지 몇 달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휴학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학교 앞에까지 찾아와 1시간 동안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촛불집회 연 사람들을 봤습니까?

"형이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10여명 정도였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보통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무슨 도(道)를 닦는 분 같은 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투쟁(鬪爭)

김씨가 포털의 폭격과 네티즌의 악플 공세에 맞서기로 한 계기는 우연하게 마련됐다. KBS의 한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한 뒤 KBS시청자위원으로 있던 변희재씨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는 "포털도 소송의 대상이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김씨에게 말했다. 그는 두 명의 변호사를 소개시켜줬다.

7월 7일 김씨는 '포털 피해자 모임'의 일원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다음날 그 전까지 꿈쩍도 않던 포털 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를 일방적으로 매도했던 글들이 삭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7월 9일 네이버·다음· 야후 코리아·네이트 등 4개 포털을 상대로 5억원의 손배 소송을 냈다.

포털을 상대로 싸우는 한편 그는 자신을 비난한 네티즌 80명에 대해서도 경찰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네티즌들의 소재지가 전국이어서 경찰 조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 결과 잘못을 인정하고 합의했거나 미처 조사하지 못한 네티즌을 제외한 50명이 작년 5월 벌금형을 받았다.

―그렇게 포털에게 피해를 당했는데 불법 게시물 삭제 요청을 해보지는 않았나요?

"해봤지요.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포털측에서는 '구체적인 URL을 언급해달라'더군요. 아시다시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URL을 저 혼자서 카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털에 앞서 당신이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지목한 언론과 네티즌에 대해 묻겠습니다. 어느 언론이 가장 떠오릅니까.

"라디오 프로그램에 뉴스를 간추려 전해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5월 12일로 기억하는데 제가 망인을 2번 임신시키고 폭행해 유산(流産)시켰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나쁜 남자가 있을 수 있느냐'는 식의 코멘트도 했습니다. 그 라디오는 그 해 9월 말 정정보도를 했고 5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았습니다."

―다른 언론은요.

"주로 인터넷 언론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남성 탤런트와 관련돼 진실공방을 벌인 한 여성지 기자도 일방적으로 저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망인의 가족 말만 듣고요."

―네티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제가 1차로 고소한 네티즌은 38명이었습니다. 나중에 총 80명으로 늘었습니다. 악성 댓글은 워낙 많아서 제외했고 사진과 연락처, 허위사실을 유포한 네티즌만 대상으로 했습니다. 모두가 만 18세 이상 성인들인데 하나같이 순수한 사람들이었어요."

―왜 그런 일을 했다고 하던가요.

"잘못을 인정하면서 모두 '사실인줄 알고 사회적 정의감 때문에 그랬다'고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많았고 무직자도 꽤 됐어요. 직장인 중에는 간호사가 기억납니다."

―네티즌 처벌이 꽤 오래 걸렸죠.

"3년이 걸렸습니다. 공소(公訴)시효가 거의 끝날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담당검사도 여러 번 바뀌었어요."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다 같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절 보호하려고 나섰지요. 제가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집안에 법조인이 있습니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법무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을 한 적은 있지요."

―고소 비용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3000만원가량 들었습니다. 다 집에서 도와줬는데 그 때문에 빚을 많이 졌어요. 화곡동에서 살다 월계동으로 옮겼고 지금은 의정부에서 삽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끈덕지게 법정 싸움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성격이 집요한 편입니까.

"하는 일이 원가계산이다 보니 치밀한 편입니다."

◆거인(巨人)에 맞서

―포털 사이트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당시에는 몰랐는데 자료를 수집해놓고 보니 특이한 점이 있었어요. 저를 비난하는 기사 하단에 영락없이 저에 대한 안티 카페와 서명 운동으로 연결되는 링크를 걸어놓은 겁니다."

―어느 포털입니까.

"다음입니다."

―서명운동이 실제 벌어졌습니까.

"다음 아고라 서비스의 네티즌 청원이라는 코너에 'A님 부모님 돕기 운동-김명재 공개사과 촉구'라는 서명 운동이 등록됐습니다. 총 1만6806건의 서명과 실명 비방 글이 올라왔습니다."

―안티 카페나 서명 운동만 링크돼있었나요?

"연관 검색어라는 것도 있었어요. '김명재'라고 치면 사망한 A씨의 실명과 자살 같은 단어들이 주르르 뜨는 거지요. 포털들이 다 비슷했어요."

―소송과정에서 포털들이 잘못을 인정하던가요.

"다음 같은 경우는 3시간 동안 쿠키뉴스를 메인 화면에 올렸다가 내렸다는 변론자료를 내놓았지요. 그쪽에서는 변론자료라고 봤는지 몰라도 '언론의 편집기능'을 했음을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포털은 그런 변명은 안 했지만 댓글이 많이 달린 것은 그만큼 비중 있게 보도됐다는 추론(推論)이 가능해지지요."

―포털 사이트 담당자를 만나보긴 했습니까.

"포털 측 담당자들이 나온 적은 없습니다. 인터넷기업협회 사무국장이라는 분이 '포털에는 워낙 많은 글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것들이 명예훼손인지 일일이 판단하기는 어렵다'며 포털 측 입장을 대변한 적은 있습니다."

―왜 포털은 그동안 개인의 명예훼손에 둔감했을까요.

"포털은 페이지 뷰를 기준으로 광고수익을 올립니다. 선정적인 기사가 클릭 수를 올릴 수밖에 없으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지요. 제가 첫 소송을 벌일 때인 2005년 네이버의 연 매출액이 3000억원이었습니다. 지금은 1조원대가 됐지요. 그중에 광고수익이 60~70%를 차지하니 자극적인 편집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업 모델임이 분명해진 거지요."

―2007년 5월18일 1심 판결에서 4개사에 도합 16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당초 요구한 5억원에 비해 액수가 줄어든 이유가 뭡니까.

"제가 사표를 5월 9일에 썼는데 서류에는 5월 6일 날 쓴 것으로 돼 있었어요. 사이버 폭력피해가 시작된 게 5월 7일이고 허위기사가 보도된 게 5월 8일이었습니다. 법원은 하루 차이를 보고 실질적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지요. 1600만원은 정신적 위자료였습니다."

―2008년 7월 2일의 2심에서는 오히려 3000만원으로 늘었지요.

"제가 사직서에 실제 사인한 날짜를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4개사 중 3개사만 대법원에 상고했지요.

"네이트는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지난해 2심이 진행 중일 때 광우병(狂牛病)파동으로 인한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인터넷이 주무대였지요.

"작년 촛불 집회는 법 자체를 무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광우병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의논해야 할 문제인데, 맹목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언론사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저는 그게 일종의 무정부(無政府)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이번 대법 판결을 보면 표현의 자유는 보장한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에 대한 것은 포털에 대해 언론에 준하는 책임을 물은 것이고요."

―모든 소송이 끝났습니다. 이제 괴롭지 않은가요.

"아직도 악몽을 꿉니다.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제 목을 조르는 꿈을 꾸곤 합니다."

―당신의 명예를 100이라 본다면 4년 동안 얼마를 회복했다고 생각합니까.

"50 정도 회복됐다고 봅니다."

―직장을 잃고 지금까지 실업자로 지냈나요.

"2006년 1월부터 구직활동을 시작했어요. 그해 3월 아는 분을 통해 경기도 오산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취직할 때 당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습니까.

"다 이야기했지요.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곳에서 자취를 했는데 너무 외로워 6개월 만에 그만뒀습니다."

―지금까지 몇 개 회사를 다닌 겁니까.

"지금 회사까지 치면 4곳입니다."

―그 사건 이후 여자를 사귄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여성에게도 당신의 이야기를 했나요.

"그는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개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배우자에게도 이 이야기를 만날 때부터 할 겁니다. 숨겨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김씨는 '이번 대법 판결로 향후 당신 같은 사례가 생기지 않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본다"고 했다. 기자가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니냐'고 묻자 그는 "탤런트 최진실씨 자살 사건 후 한 증권사 여직원이 인터넷에서 비판을 받은 적은 있지만 지금은 잠잠해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나이 서른셋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그는 희망을 가진 것 같았지만 기자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대법 판결이 난 날 보도된 기사에도 여전히 악성 댓글들이 있었다. 그가 명예훼손과 별개로, 숨진 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