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제약회사가 한 종합병원에 수의(隨意)계약으로 항혈전제를 납품한 가격은 한 정(錠)당 1739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중형 병원에 공개 입찰로 판 가격은 18원에 불과했다. 같은 약을 무려 96배나 차이 나게 판 것이다.
이 같은 실상은 본지가 22일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을 통해 입수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건강보험 급여 의약품 공급 현황' 자료에 나타나 있다. 자료에 따르면, A제약사 혈액순환 개선 치료제도 공개 입찰에서는 14원에 판 반면, 수의계약에서는 715원을 받아 51.1배의 차이를 보였다.
이는 일부 병·의원이 공개 입찰이 아니라 특정 도매상과 수의계약을 맺은 후, 약품을 비싸게 사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같은 국·공립병원은 법에 따라 의약품을 공개 경쟁입찰로 구매해야 하지만, 병상 100개 이상 일반 병·의원과 국립이 아닌 종합병원은 수의계약으로 약을 살 수 있다. 수의계약을 통해 약값에 거품이 끼게 되고 리베이트(의약품 구입의 대가로 기업이 병원에 제공하는 금전적 이익)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약값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비싸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작성한 '외국과의 약가(藥價) 비교' 자료를 보면, 가장 많이 쓰이는 50개 약 성분으로 제조한 복제약(특허기간이 끝난 신약과 동일하게 제조한 약) 가격이, 우리나라 약값을 100원으로 잡으면 일본은 49원, 프랑스 73원, 독일 58원 등이다. 우리보다 더 비싼 곳은 미국(172원) 정도였다.
비싼 약값의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지난해 건강보험 총지출액 34조8457억원 중 약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27.4%(9조5487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약값 지출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0% 내외를 세 배 가까이 웃도는 것이다.
왜 이렇게 약값이 비싼 것일까. 수의계약 관행과 함께, 제약업체들의 약값 부풀리기 신고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앞서 자료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제약업체가 신고한 약값만큼을 정부가 지급하는 '실거래가 상환제도'에 따라, 제약업체가 정부에 건강보험 대상 약품 거래가격을 부풀려 신고해 상환받는 것이다.
◆약값 부풀리기 신고
심평원 '건강보험 급여 의약품 자료'에 따르면, B업체는 자사 제품을 복지부가 정한 상한가로 거래했다고 복지부에 신고해 해당 금액을 상환받았으나, 실제 거래가격은 신고가격의 약 92%인 것이 밝혀졌다. C제약사도 자사 제품을 상한가로 신고했지만, 실제로는 도매업체·병원 등에 신고가의 96%로 거래하고 있었다.
심평원 관계자는 "공개입찰을 하는 국·공립병원을 제외할 경우 거의 100% 상한가로 거래했다고 신고해 상환받고 있다"며 "실제 거래가는 이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는 신고 가격과 실거래가 차액의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리베이트에 쓰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제약업체의 허위 신고가 드러나도 처벌 조항이 부실하다.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 최유천 센터장은 "제약사가 거래가를 신고하지 않으면 과태료 100만원을 부과하지만, 허위로 보고할 땐 처벌할 조항이 없다"고 말했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는 "실거래가 상환제를 비롯한 정부의 약가 규제 정책은 문제가 있다"며 "자유 입찰을 통한 가격 경쟁이 아예 막혀 있으니 업체가 자사 제품을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해 병원·약국 리베이트에 치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정부도 실거래가 상환제가 약값 거품을 빼는 데 실효가 없다고 보고, 병원과 약국이 약을 싸게 사는 만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방안(저가구매 인센티브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늘어나는 리베이트
그런 와중에도 리베이트는 갈수록 늘어나 약값 거품을 부풀리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일 "지난해 다국적 제약사들이 접대비 명목으로 지출한 비용은 2007년(490억원)에 비해 24% 늘어난 600억원"이라고 밝혔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 13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주요 120개 의약품 제조업체는 2007년 광고선전비·접대비 등을 아우르는 '판매 관리비'로 전체 매출액의 39.1%에 해당하는 4조1739억원이나 지출했다. 약값의 20% 정도를 리베이트 비용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제약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비용은 약값에 전가돼 고스란히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