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은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화제의 중심에 서곤 한다. 스타에 얽힌 사연과 기억들은 한결같이 시대를 담고 있어서다. 그들을 통해 웃었고, 그들을 통해 눈물도 흘렸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 스타들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도 다 그들에게 녹아 있는 시대적인 향수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스타들은 과연 어떤 추억을 가슴에 담고 있을까. 스타들이 간직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지면에 옮겨 본다. |
축구스타 허정무와 연예스타 최미나의 결혼은 당대 최고의 뉴스였다. 오죽했으면 '정오뉴스'에서 속보를 다 내보냈을까. 지금이야 스포츠-연예스타 커플이 심심찮게 나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참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최고와 최고의 결합이 아니던가. 하지만….
▶MC와 심사위원
첫 대면은 1975년이었다.
'가요올림픽'이라는 쇼프로를 녹화하던 TBC 운현궁 스튜디오. 방송에서 허정무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하면서 잠시 스쳤다. 최미나는 임성훈과 함께 국내 최초의 남-녀 더블 MC로 날릴 때였다. 연세대 2학년 허정무는 박스컵 준결승(이란전 1대0)과 결승(버마전 1대0)에서 거푸 결승골을 넣어 일약 스타가 됐고.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인 1978년. 스포츠 기자 최동철씨가 자기 집으로 둘을 초대해 정식으로 인사를 시켰다.
"아이고, 처음엔 영 아니었어요. 박력도 없고, 매력도 없고, 조용하고, 여자 같고…." 최미나는 지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허정무의 애프터 신청에 아무 생각 없이 "목요일"이라고 답해 놓고는 잊어버렸다. 약속하면 칼이었던 허정무는 바람맞고 나서 힘겹게 전화통화가 되자 폭발했다. "스타면 다냐. 옆에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때렸을 텐데…."
최미나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 박력 있네? 곱상하게 생겨 갖고선."
여의도 한 카페에서 두 번째 약속을 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 허정무는 어금니를 물고 나갔다. "또 잘난 척하면 한 대 때리고 끝내려 했죠. 근데 살살 웃으며 애교를 떨더라고요. 나 참."
▶10만8000원 VS 300만원
최미나는 방송만 마치면 피아트를 몰고 태릉선수촌으로 향했다. 운동하는 남자친구에게 우유와 단팥빵 먹이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데이트 장소는 인근 야산. 공인들이라 세간의 눈이 무서웠던 게다. 그래도 조금씩 소문이 돌았고, 국가대표 허정무는 조급해졌다. 중요한 건 최미나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한강 근처의 카페 '장미의 숲'으로 불러내 아예 아퀴를 짓자고 덤볐다. "나 돈 없다. 내 봉급 갖고 살림할 자신 있냐. 리어카를 끌더라도 안 굶길 자신 있다."
허정무의 봉급은 10만8000원. 최미나의 한 달 수입은 최하 300만원. 서울시내 아파트 한 채가 1000만원도 안 할 때였다. "리어카는 왜 끌어요. 그 정신으로 잘 살면 되지."
▶"세탁소에서 오셨어요?"
허정무는 1979년 메르데카컵 참가 도중 말레이시아에서 국제전화로 청혼했다. 최미나는 어머니에게 알렸고, 예상대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팬티 입고 뛰어다니는 사람한테 줘!"
사실 주변 여건이 최악이었다. 남정임 같은 스타들이 재일교포와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의사와 교수 사위를 본 어머니로서는 '팬티 바람'이 기막힐 수밖에.
그래도 밀어붙여야 했다. 뚝심의 허정무는 당시 서울 반포 경남아파트의 최미나 집으로 돌진했다. 처음부터 장벽이었다.
벨을 눌렀는데도 문은 안 열리고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탁소에서 오셨어요? 우리 세탁물 맡긴 거 없는데…." 삭막하게 짧은 머리(당시 해병대 소속)에 후줄근한 검정 티셔츠. 하필 남루한 가방까지 들었다. 곧바로 훈련 들어갈 심산으로. 자기가 봐도 촌티 그 자체였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에 촌닭 축구선수라…. 당시로선 문이 열리면 그게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언니와 형부들이 '신선하고 좋다'며 어머니를 설득했죠. 나중에 그러시더라고요. '죽을 때까지 속 안 썩힐 사람 같더라'고."
▶쌍둥이 할아버지-할머니
1980년 6월 24일 비밀약혼이 언론에 터지는 통에 서둘러 7월 18일 결혼식을 올렸다. 닷새 후 허정무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떠났고, 두 달 후 아내가 합류했다.
이듬해 3월 큰딸 화란이(네덜란드에서 낳았다고 해서 지인이 붙여 준 이름)가 났다. 짓궂은 언론은 '속도위반'을 강조했다.
그 딸이 작년 11월 아들 쌍둥이를 안겨줬다. "(강)하준이, 예준이만 보면 스트레스가 싹 날아갑니다. 요 녀석들 보는 재미로 살죠."
월드컵대표팀 감독 허정무(54ㆍ실제 나이 56)와 방송인 최미나(57). 또래에선 보기 드문 연상녀-연하남인 이들 부부는 요즘도 연인처럼, 친구처럼 마냥 즐겁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