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마렴 본당의 빌렘 신부가 청계동으로 와서 세례성사를 위해 그곳 예비신자들을 찰고(察考:면담)한 것은 삼왕래조축일(三王來朝祝日:주님공현대축일)인 1897년 1월 초순이었다. 그 뒤 며칠 120명이 넘는 청계동의 예비신자 거의가 찰고를 받았으나, 1월 11일 빌렘 신부가 세례 성사를 베푼 것은 그들 가운데 서른세 명뿐이었다. 그때 안태훈, 태건 형제와 중근도 그들 속에 끼어 영세를 받았는데, 안태훈의 세례명은 베드로였고 태건은 가밀로, 중근은 도마였다.
"여(予)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의 이름으로 도마에게 세례를 주노라."
빌렘 신부가 어딘지 낯설게 들리는 조선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에 성수를 찍어 바를 때마다 중근은 영혼에 낙인이 찍히는 듯 뜨겁고 세찬 충격을 받았다. 그 아침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불신과 의혹들이 그 순간 자취 없이 흩어지고 그늘 없는 믿음과 그 믿음에서 오는 평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끝내 석연치 않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조차도 그 순간만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청계동에 첫발을 들여놓은 빌렘 신부는 그해 4월 중순 마렴 본당에서 부활절 미사를 마치기 바쁘게 다시 청계동으로 왔다. 그리고 여드레나 머물면서 찰고 끝에 지난 1월에 영세를 받지 못한 예비신자 가운데서 예순여섯 명을 더 받아들였다. 그때 중근의 어머니 조씨는 마리아, 아내 김아려는 아녜스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고, 명근을 비롯한 여러 사촌들과 아우인 정근(定根), 공근(恭根)도 영세를 받았다. 30년 전에 배교(背敎)하여 목숨을 건진 뒤에 냉담자로 지내면서 세례명까지 잊어버렸던 안 세실리아의 남편이 요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은 것도 그때였다.
부활절 세례 때는 중근의 할머니 고(高)씨도 영세받기를 원했으나 큰아버지 태진이 말려 받지 못했다. 태진 자신도 제사를 받들어야 할 장손임을 내세워 영세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마 뒤에는 청계동을 떠나 해주로 돌아갔다. 세례받기를 마다한 친지 몇 명과 일꾼 하나도 그때 안태진을 따라 청계동을 떠났다.
그리하여 청계동에는 1월에 영세를 받은 서른세 명에다 부활절 무렵에 세례를 받은 예순여섯 명을 합쳐 아흔아홉 명의 새로운 신자들만 남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어른이 아닌 사람은 중근의 아우인 정근·공근과 또 다른 어린 사촌을 합쳐 셋뿐이었다. 그렇게 청계동과 중근은 천주교가 열어둔 길을 따라 근대사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세례를 받고 천주교도가 되어, 조선의 행정력과 사법권을 간단히 무력화(無力化)시킬 수 있는 천주교와 불란서 신부를 등에 업게 된 안태훈은 곧바로 옛 토호(土豪) 활동에 뛰어들었다. 탁지부 공무미(公貿米) 때문에 쫓기게 되면서 위축되었던 호족(豪族) 의식이 새로 얻은 든든한 후원자로 전보다 더 기세 좋게 되살아난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지나친 기세가 곧 일을 냈다.
지난해 종현 성당으로 몸을 숨기기 전에 안태훈이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것은 갑오년에 있었던 결전(結錢:조선시대 결 단위로 매긴 토지세) 중과(重課)를 둘러싼 시비였다. 갑오년(1894년) 조선 조정은 봄에 농민들로부터 결전을 거두어 놓고서도 갑오경장의 새로운 장정(章程)에 따라 겨울에 한 번 더 결전을 거두었다. 안태훈은 그 부당함을 참지 못해 탁지부에 소장을 내었고, 해주 관찰사에게도 엄중한 항의문을 내 그 그릇됨을 바로 잡으려 했다.
애초 일이 워낙 잘못된 데다, 그때만 해도 안태훈의 위세가 살아있을 때라 해주 관찰사도 안태훈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두 번 낸 결전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대신 이듬해 을미년에 낼 토지세에서 결(結)당 16냥 5전 7푼을 빼주도록 했다. 그런데 탁지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펄펄 뛰며 해주감영으로 공문을 내려 보내 나라의 세금을 함부로 줄여줄 수 없으니 달리 좋은 방도를 내보라고 훈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