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럽이 정치적 사건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그는 전쟁과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의 뜻으로 1944년 공산당에 가입했고, 전쟁과 대량학살을 증오하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 '게르니카(1937)' '납골당(1945)'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이 있다. 이 중 마지막 두 점의 그림은 한국전쟁을 다룬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시 공산당원이던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의 의뢰로 제작한 것이지만 학살의 주체가 모호하게 표현됐다. 그래서 이 그림은 공산당과 그 반대 세력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화가 난 프랑스 공산당은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미군이 개입한 양민학살을 소재로 했다는 주장 때문에 냉전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금기시 돼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피카소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로 인해 전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을 당시, 피카소는 입체파 화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그를 나치는 타락한 예술가라고 비난했고, 예술성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낙인 찍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독일군이 1944년 파리에서 철수하자 피카소는 나치에 저항한 화가로 더 유명해졌다. 비록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들 때문에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올라있던 화가였다. 피카소는 동시대의 그 어떤 화가들보다 정치적이었다. 조국 스페인에서 비인류적인 내전으로 잔인한 폭력이 계속될 당시 단 한 번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인류의 정의가 실패할 수 있음을, 인간의 정신이 폭력에 꺾일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허망하게 산화할 수 있음을 스페인에서 배웠다"고 했다.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투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의 간판인물이 됐고, 프랑스는 파리 해방 기념으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그림도 무기가 될 수 있다
1949년 프랑스 공산당은 평화를 상징하는 포스터를 피카소에게 의뢰했다. 그가 제작한 포스터의 중앙에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었는데, 그 후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됐다. 피카소는 비록 총을 들고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직접 맞서 싸우지는 않았으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서 싸웠다. "예술가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이거나 결정적인 사건, 혹은 가슴 훈훈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형성해가는 정치적 존재다"라는 신념에 따라 그의 그림은 단순히 집안의 벽을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인류애를 표방하는 공격무기로 사용됐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내 작품이 장차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피카소의 염원과는 달리 우리는 새로운 21세기의 서막을 전쟁으로 장식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더 많은 전쟁과 잔악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여전히 폭력과 테러가 행해지고 있다. 냉전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고 명분 없는 총성으로 인해 우리의 젊은이와 아이들이 죽어간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이제는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의 강대국임을 자처하는 국가가 모든 불법, 무법의 행위를 불사하고 있다.
◆평화의 상징인 순백의 비둘기가 전하는 거장의 메시지
피카소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을 기괴하고 왜곡된 표현으로 그렸던 것처럼 이 지구촌에서도 실제로 점점 진실이 퇴색되고 왜곡되는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자행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폭격으로 알려진 게르니카 폭격은 이후 현대 전쟁에서 일반적인 양상이 됐고, 가슴 아프게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유사한 형태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진행형인 전쟁에 "비둘기는 잿빛이 아니어야 한다. 순백의 평화의 색이어야 한다"는 거장의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전한다.
◆생각해보기
1. 자신이 비판 받을 것을 각오하고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순수 미술을 지향하는 화가 중 어떤 화가가 예술사에 있어서 더 의미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한쪽을 선택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보시오.
2. 그리고 그런 사회고발성의 예술 작품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