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해마다 가을 의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을 한다. 여왕은 다이아몬드가 2868개 박힌 왕관을 쓰고 백마 네 마리가 끄는 1851년산(産) 마차로 거처인 버킹엄궁에서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궁으로 행차한다. 여왕이 의사당에 가 있는 동안엔 하원 의원 중 한 명이 버킹엄궁에 '인질'로 잡힌다. 혹시 저질 의원이라도 있어 여왕에게 무례하게 굴면 대신 혼내기 위해서다. 의사당에선 의원들은 물론 개원식에 초청된 각국 대사들도 여왕이 착석(着席)을 명해야 앉을 수 있다.
▶몇년 전 앤드루 영국 왕자가 방한해 대한상의를 찾았을 때 주한 영국대사관측은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왕자가 들어오면 모두 일어설 것, 가벼운 목례는 하되 허리 숙인 인사는 피할 것, 호칭은 'Your Royal Highness'(전하)로 하되 두 번째부터는 'Sir'(각하)라고 부를 것….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버킹엄궁에서 여왕으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을 때 무릎을 꿇었다.
▶200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미국 방문 때 부시 대통령은 "여왕께서 미국이 17…년 독립선언 20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는 데 동참하셨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국 독립 200주년의 해인 '1976년'의 '19'를 '17'로 읽어 여왕을 200살도 더 먹은 사람으로 만들 뻔한 것이다. 부시는 여왕께 윙크하며 실수를 얼버무리려 했다. 영국 언론들은 "윙크는 영국 왕실 예법에 없다"며 부시를 '결례의 천재' '멍청한 더브(부시 대통령의 중간 이름 W의 텍사스식 발음)'라고 조롱했다.
▶엄격한 예법과 격식이 영국인들에게 통용되는 것은 그들의 국민성 때문이다. 영국에도 국기와 국가(國歌)가 있지만 실생활에서 우리의 태극기나 애국가처럼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웅장한 건축과 기념물도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많지 않다. 이런 인위적 상징물이 약한 대신 그들은 전통에 대한 존중을 통해 국민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공유한다.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여사가 버킹엄궁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리셉션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고 해서 또 한 차례 '결례' 논란이 일고 있다. 보기에 따라선 영국인의 전통과 격식에 대한 집착이 좀 지나치고 21세기 현실에 안 맞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과하다고 흉보기엔 우리는 우리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너무 많이 부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