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주관적이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기억하곤 한다. 연인이나 부부, 친구 간에 싸움이 있을 때 서로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추려 간직하는 것도 비슷한 까닭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모순이 있는데, 때로 사람들은 너무도 기억하기 힘든 사실만을,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부분을 더 섬세히 간직한다. 기억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예술가들은 기억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 왔다. 기억에 관한 영화들을 살펴 보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기억의 주관성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영화는 한 쌍의 연인을 그려내는데 하나는 여자의 시선으로, 다른 하나는 남자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남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장갑을 수정이라는 여자가 '우연히' 찾아줬다고 기억한다. 한편 여자의 기억에서, 수정은 '의도적으로' 장갑을 남자에게 전달해 준다. 두 사람의 회고는 계속해서 엇갈린다.
'오! 수정'의 두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기억한다. 초라하고 창피한 사실들은 은폐하고 때론 왜곡한다. 자신이 재편집한 기억 속에서 스스로는 꽤나 자존심 있고 품격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상대방의 기억 속에서 그 모습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멋있게 누군가와 대결했던 것으로 술회됐던 사건이 알고 보면 굴욕적 사건으로 판명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음험한 모사꾼으로 재해석된다. 홍상수 감독은 기억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이기심과 연관해서 드러낸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기억의 주관성과 인간의 이기심을 연계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라쇼몽'을 들 수 있다. '라쇼몽'은 살인사건을 둘러 싼 여러 사람의 각기 다른 진술을 토대로 조작된 기억을 낱낱이 보여준다. 진술이 거듭될수록 사건의 실체는 점점 더 불투명해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대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고 마음대로 조작한다. 17대1로 싸운 영웅적 싸움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자기 편집이 기억의 본질 중 하나인 셈이다.
사실 기억이 엇갈리는 경험은 일상에서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몇 년 전 가족식사에서 어떤 메뉴를 선택했는지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고, 함께 갔던 여행지 이름이 서로 불일치하기도 한다. 기억은 생각보다 허술해서 당시 개인의 정서 상태나 의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개 사람들은 사라진 것, 되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낭만적으로 기억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대개 그렇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나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은 첫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영화라고 보는 편이 옳다. 과거에 묻혀 있던 기억은 현재의 시점에서 새롭게 재탄생 된다. 묻혀 있던 보물이 발견되듯이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킨다. 첫사랑이라는 코드는 청소년기의 순결한 감정과 어울려 기억을 신성화한다.
신성화라는 말은 어떤 사실이 기억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는 기억을 신성화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된다.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변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름다운 부분만이 취사 선택될 확률이 높다. 과거, 기억 속 연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채색된 채 모자이크처럼 남아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한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 '올드보이'에서 비밀을 알아버린 오대수가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원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오대수에게 있어 '기억'은 현재의 삶을 속박하는 원죄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야 한다고 말한다. 때로 사람들은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천재였던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 전쟁의 공포감을 잊지 못하는 '디어 헌터'의 주인공들처럼 복수, 죄책감과 같은 개념도 고통스러운 기억과 연관된 개인의 감정들이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경험과 체험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개인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술은 바로 이 각기 다른 기억에 가치를 부여한다. 기억의 주관성은 다양한 해석의 토대이기도 하다.
◆더 생각해 볼 문제
1.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기억상실증' 모티프는 극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토론해 보자.
2. 기억의 고통에 관해 그려내는 작품들을 생각해보고 고통의 원인을 파악해 보자.
3. 주관적 기억의 오류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해보자.